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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08. 2024

좋은 문장 표현에서 문장부호까지-이수연

동해선에서 읽은 책 97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오며가며 만나는 광고를 유심히 본다. 좋은 건 참고하고 나쁜 건 교훈으로 삼고 이상한 건 뭐 때문에 이상하게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얼마 전에도 그런 현수막을 봤다.   

보름달처럼 청명한 추석
한가족처럼 포근한 남구

청명한 추석? 그것도 보름달처럼?

최근 내가 사는 부산 남구에서 추석 인사로 걸은 플랭카드 문구다. 뭐, 언제나 그랬듯 명절 때마다 걸리는 플랭카드로 지역 정치인의 생각과 정가의 분위기를 가늠해보면서, 아울러 이 말이 맞는 건지도 생각한다. 뭔가 어색하다 싶으면 왜 그리 느끼는지 찾아보고 고민도 해보고...     


저 문장, 어떤가? 이상한가? 우선, 다들 그렇겠지만 "보름달처럼 청명한 추석"이 거슬릴 것이다. 추석이 청명한데, 보름달과 같다는 말이다. 사전의 예문엔 보름달이 청명하다는 표현이 존재한다. 또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는 경우에도 청명을 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그러니까 생활 언어적으론 하늘, 날씨, 시야, 그리고 소리에 주로 쓰인다.      


여기서 관건은 청명한 추석이 무엇이냐는 것? 맑고 깨끗한 추석을 도대체 어떤 추석으로 받아들여야 하냐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비유로 보름달을 들었으니 그 의미가 더 모호해진다. 왜냐...보통 추석을 표현하기 위해 보름달을 끌어오면 "풍성한"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추석 선물 세트 포장에 주로 쓰이는 상투적 메타포처럼 말이다. 아마 저 글을 쓴 이도, 만든 이도, 결제한 윗 사람도 "청명한 추석"이 어떤 추석인지 말을 못할 것이다.     


처럼? 같이?

좀 더 예민한 사람이라면 '어? 같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저 문구를 함께 본 딸도 그랬다. 그런데 '어차피 둘 다 말이 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이어 들었을 테고 말이다. 또, 누가 그 차이를 물으면 답이 궁하여 자신의 생각을 넘겼을 지도 모르겠다.     


자, 아주 심플하게 설명하면, 저 경우, 처럼보다 같이가 권장사항이다. 처럼은 상태의 설명을 위한 예시다. 그래서 상태나 상황이 더 중요하다. "보름달처럼 청명한 추석"이라면 "청명한 추석이 보름달과 같다."고 옮길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뒤에 오는 "보름달"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되도록 가장 상징성이 강한 것과 대조를 하니 일반적으론 대체 대상의 물색이 쉽지는 않다.     


여하간...반면 같이는 요즘 애들말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빼박이다. 그것이 저것인 경우에 쓴다. 그래서 "보름달 같이 청명한 추석"은 "추석은 보름달"로 옮겨 써도 이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역시 "한가족 같이 포근한 남구"도, "한가족 같은 남구"로 써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읽는 시민의 입장에서 '그렇지. 남구는 한가족이지'하고 자연스레 연상이 되어야 저 "같이"가 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대상의 전형성이다. 진짜 그거 외에는 다른 비유 대상이 없을 때, A는 B일 때, "~ 같이"를 쓴다. 예를 들어 "칠흑 같이 어두운 밤, "태양 같이 눈부신 불꽃", "가족 같이 화목한 직장"의 경우, 어두운과 눈부신이 빠져도 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만큼 전형성을 갖고 있다. "칠흑 같은 밤.", "태양 같은 불꽃"...."가족 같은 직장", "가족 같은 팀 분위기"     


자, 그럼 정리해 보자. 남구의 저 문구는 크게 두 가지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보름달과 추석의 의미 연관을 "청명"으로 두어 의미 전달에 실패했다. 시민들이 "추석이 청명하길" 기대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풍성"하길 바라고 "복이 가득하길" 바라지 않을까? 그러니 다들 그렇게 보름달을 끌어 와 쓸 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고...     


둘째, 첫째 줄의 생소한 비유로 인해, 처럼이든 같이든 그 사용의 효과가 사라졌다. 처럼이든 같이든 대표성과 전형성이 있어야 하는데 보는 이가 조금이라도 의구심을 가지면 그 비유와 대조는 실패라고 봐야 한다.    

 

셋째, 가족이 곧 남구와 같고, 남구가 곧 가족과 같다면 "같이"를 썼어야 한다. 왜냐하면 중간의 "포근한"의 전형으로 "가족"을 대체할만, 가족보다 더 강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남구의 행정이 포근하지, 남구라는 지역이 포근한지, 실제로 그러한지의 논쟁은 덮어두자.)   


누가, 누구에게 복을?

올 1월에 걸은 신년 인사 현수막의 문구도 이상했다.  보통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더 행복하세요."와 같은 문구를 걸지 않나? 그런데 우리 동네 구청의 문구는 "주민들께 더욱 값진 새해를 기원합니다."였다. 일단 생각해보면 문법적으로 틀린 말은 없다. 아닌가? 여하간 난 그렇게 판단했다. ~께는 상대를 높일 때 쓰는 말이니까 "주민들께"라는 표현은 나쁘지 않다. "더욱 값진 새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기원합니다."도 무난하고, 갑진년이라고 해서 아주 애를 써서 "값진 새해"라는 말을 생각해냈다는 것도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다 합쳐서 읽으면 뭔가 어색하다. 왜 그럴까?      

이 문구를 본 그 주말, 부산국립국악원에 본 공연에선 복을 비는 노래들이 주를 이뤘는데, 대사 중엔 늘 "용왕님께 비옵니다.", "천지신명께 비옵나니." 같은 표현이 나왔다. 그걸 듣고 깨달았다. 복이든 축복이든, 높은 상대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주민들께 바라오니 올해도 큰 응원 주십시오." 같은 표현이 무난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수막의 문장에선 상대-주민-를 높여놓고 기원을 해주는 것이니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나만 그런가? 재미있는 건 이 문장에서 "더욱 값진 새해"대신 "복을", "행복을" 같은 평범한 단어를 넣어 버리면 주민들이 복을 주는 주체가 된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용왕님처럼.     


그래서 결국 중간의 "더욱 값진 새해" 앞에 쉼표를 하나 찍어 버리면, "주민들께, 더욱 값진 새해를 기원합니다."가 되면서 주민들이 일종의 기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용왕님과 천지신명의 위치로 격상된다는 것. 솔직히 이걸 안 찍어도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문장이지 않나?     


결론적으로 이 문장은 주민들의 새해가 더욱 값지게 되길 기원하는 문장으로도, 값진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하고 관청과 공무원들이 주민들께 비는 형태의 문장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중의적인 문장인 것이다. 상대를 높인다고 높인 것이, 그렇게 높여놓은 상대가 복을 받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고 쓴 문장이 이런 사태를 불러 온 듯하다. 당시 내가 이 문장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한 이유다.          


선사유적이 핫스팟?

같은 시기, 울산과 부산 사이를 오가는 동해남부선 안에서도 이상한 광고를 봤다. 문구는 이랬다. "선사시대의 생생한 모습들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신비로운 발자취와 마주하는 어메이징 핫스팟"


위에 문장은 반구대암각화&천전리 각석 유적의 동해선 내부 광고의 바디 카피다. 문장이 긴 건 넘어가자. "숨 쉬는" 뒤에 쉼표 하나 찍으면 해결되는 문제니까. "모습"을 "모습들"이라고 복수라고 쓴 것도 넘어가자. "시대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넘어가자.     

그런데 "신비로운 발자취와 마주하는 어메이징 핫스팟"은 넘어가기 힘들다. 핫스팟의 뜻은 여러가지다. 요즘엔 IT 용어로 가장 많이 쓰이지만 영어권에선 "활기 넘치는 곳, 신나는 곳, 번화가"의 뜻으로 주로 쓰인다. 핫플레이스에 해당되는 표현인데...핫 플레이스는 특정 실내 공간의 개념이, 핫스팟은 지리적 공간의 개념이 강하다. 참고로 핫 플레이스는 콩글리쉬다. 그러니까 어디 나가서 쓰지 마라.     


자, 그럼 선사시대 유적이 어메이징 핫스팟이라는 단어에 부합하는가의 문제가 남았다. 어떤가? "선사시대 유적"이 "놀라울 만큼 뜨거운 장소"라는 표현에 적합한 장소인가? 조화로운가? 난 모르겠다. 중요한건 "오롯이"와 "신비로운 발자취"라는 제법 고급스러운 표현을 써 놓은 뒤 마무리를 저렇게 했다는 점이다. ‘어메이징 핫스팟’, ‘어메이징 핫스팟’     


동해선이 한가해보여도 태화강역 이용객이 대충 하루 만 명 정도 된다. 그러니까 동해선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것.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내외국인 가릴 것 없이...그런 열차 안에 교통광고를 걸 때는 그야말로 심사숙고해야하지 않을까? 그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가 아닌가. 뭔가 더 진중하면서도 세련 된 표현으로 마무리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업무상, 지자체의 홍보실의 공식 문서, 대외 홍보 슬로건이나 책자를 자주 본다. 그때마다 "이거 좀 이상한데요."하고 담당자에게 슬쩍 말하거나, 어떤 땐 담당자가 내게 의견을 구해 그리 말해 줄 때도 있다. 그때마다 듣는 말은 "시장(구청장, 군수)님이 좋아하세요."나 "시장(구청장, 군수)님이 직접 만드셨어요."하는 대답이다. 윗 분이 그렇게 쓰셨고 좋아하시니 밑에선 이상해도 토씨하나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상한 구조와 문법, 어색한 단어의 조합을 가진 슬로건과 플랭카드와 각종 배너들이 지역에 무심히 나부낀다. 부끄러움은 담당 주무관과 일부 예민한 시민들의 몫, 그리고 눈 밝은 관광객의 몫이다. 남구는 때마다 독특한 문구를 올리는데 이 또한 구청장의 취향으로 보인다. 뭔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보이고 싶고, 다른 구청장과는 그 수준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이러는 모양인데, 때로는 무난한 게 좋다. 다들 알아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좀 독특한 걸 하고 싶으면 국립국어원 사이트라도 들어가서 이 문법이 맞는 지 좀 체크해 보던가. 다시 말하지만 부끄러움은 보는 이의 몫이다.     


나에 이런 꼰대스러움을 저자는 문법적 직관으로 표현했다.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 말이나 문장을 보고 갸우뚱하여 그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사전을 들춰보는 이의 마음을 말이다. 위에 경험담으로 서평을 대신하련다. 이 책은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보는 책이다. <어감사전>도 이러한 책인데, 이 책은 한 권을 실수로 더 사는 바람에 그 한 권은 작업실에 두고 본다. 김정선의 <동사의 맛>과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도 문장과 문법의 고민에 적잖이 답을 주는 책이나 이 두 책은 스토리 라인이 있어서 에세이처럼 읽힌다. 어휘가 고민이라면 박영수가 지은 <우리말 어휘력 사전>이 도움이 된다. 뒤의 네 권은 <유유 출판사>가 냈다. 참 돈 안 되는 책을 열심히도 만든다. 그러니 많이들 사서 읽으시길.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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