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실천입니다. 다만 통상적이고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와 거리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런 것이 어째서 정치냐, 어떻게 정치 행위일 수 있느냐, 하고 질문할 수 있죠. 하지만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며 정치의 본령입니다.”, P.136
소문의 실체
한 십여 년 전 얘기다. 김재인이라는 학자가 그 유명한 <안티오이디푸스>를 십 년에 걸쳐 번역해서 출간했는데, 그 번역료가 3백만 원가량 된다는 기사를 봤다. 이 사람은 그동안 박사 논문도 썼는데, 생계를 위해 논술학원을 운영했다는 얘기가 곁들여져 있었다. 당시는 들뢰즈가 죽은 지 불과 이십 년 밖에 안 지났을 때였고,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는 50년도 안 됐으며 이 책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천 개의 고원>이 나온 지는 40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다른 유럽 학자들의 책도 그렇지만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등장한 프랑스 학자들의 저작에 대한 우리말 번역엔 늘 논란이 따랐다. 사실 이 책, <안티오이디푸스>가 초역된 건 1994년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빠른 수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이후로, 이 책의 번역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는 것. 게다가 이후 <의미의 논리>에 대한 번역도 논란이 있었고 말이다. 그러던 차에, 당시, 젊은 학자가 제대로 된 번역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다. 물론 그 외의 다른 들뢰즈의 저작을 몇 편 읽어봤고 들뢰즈를 공부한 국내외 학자들의 책을 여러 편 읽어봤지만 김재인 교수의 책이나 논문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페이스 북 친구 신청을 한 것을 저자가 받아줬고 덕분에 난 그의 생각과 학문적 방향을 온라인을 통해서나마 약간은 따라갈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그가 자신의 박사 논문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그의 박사 논문을 찾아 읽게 됐다.
알다시피 논문엔 초록이 있다. 논문 전체를 요약한 한 장 짜리 브리프라고 보면 된다. 실용학문인 광고와 저널리즘을 전공하며 관련 대학원을 들락거리며 제법 많은 편수의 논문을 들춰보고, 또 몇 편은 써봤지만 이렇게 공들여 쓴 초록은 처음이었다. 사실 초록이라 하면 요식 행위라 여겨 그저 내용을 간단히 축약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완벽하게 함축하고 있는 영화의 예고편과 같은 초록을 선보였다.
그 초록을 읽고 맨 뒤였나, 여하간 저자가 참고문헌에 대한 코멘트를 한 것을 읽었다. 그걸 보고 더 기가 찼는데,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어로 된 문헌은 번역된 것을 참조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번역하여 읽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광기라 할 수 있지 않나? 이 광기에 압도당해 그 논문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물론 PDF 파일로 된 논문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아 아직도 다 읽지 못했지만,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야, 이거 출판 안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생각의 싸움>이라는 책을 접하고 서문을 읽어봤다. 그중 한 문장을 보고 ‘이 양반, 생각 맘에 드네.’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문장은 인문학자의 윤리에 관한 것이었는데 다음과 같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되,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윤리다.”
발레와 체조의 차이
취미로 인문학 책을 읽는 사람이 덥석 원저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니체에 관심 있다고 덥석 니체의 책을 읽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이런 이유로 난 관심 있는 이가 있으면 그 학자와 이론과 생각에 대한 대강의 큰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2차 저작을 두루 읽는다. 라캉도 그런 식으로 접근했고 푸코도 그러했으며 들뢰즈 또한 그런 식으로 빙빙 돌아 접근한 뒤 원저를 집어 들었다.
들뢰즈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만난 학자들로는 일본의 지바 마사야, 우노 구니이치, 사토 요시유키, 고쿠분 고이치로 등이 있고, 미국의 로너드 보그, 영국의 클레어 콜브룩 등이 있다. 한국 학자들로는 서동욱과 이진경 등을 읽었는데, 그중 서동욱의 글을 좋아한다. 재미-어디까지 개인적으로-있는 건 서동욱과 김재인의 차이다. 둘은 연배가 비슷하지만 서동욱은 유럽에서 공부를 했고 김재인은 그야말로 순수 국내파다. 이런 학문적 배경만큼 둘의 저서에선 많은 차이가 느껴진다.
서동욱에게선 문장의 섬세함만큼 그 논지 전개의 조심스러움도 느껴진다. 아울러 사회와 현실에 대한 조심스러운 입장, 더 냉정하게 말하면 중립적인 입장이 전해진다. 그는 순수 학술서적인 아닌 소위 철학 에세이도 몇 편 출간했는데, 거기서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나 대중에게 죽비처럼 호소하는 웅변이나 일갈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대체로 조용히, 낮게 얘기한다. 그래서인지 학술 서적에서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 들뢰즈이기에 나라마다, 학자마다, 처한 입장마다 그의 생애와 이론적 전환점을 특정하는 것도, 그 시기의 의미 부여도, 심지어 저서에 주로 사용되는 용어에 대한 해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서동욱은 자기와 다른 학자들에 대해선 대체로 말이 없고 그저 조용히 자기 할 만 만 한다.
반면, 김재인의 문장은 단호하다. 똑같이 신체를 갈고닦아 그 신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는 맥락에선 발레와 기계체조는 같은 길을 간다고 볼 수 있지만 그 궁극적 목표와 경쟁의 분야는 다른 것처럼, 김재인과 서동욱의 문장과 논지의 전개 또한 그렇다. 서동욱의 것이 발레라면, 김재인의 것은 기계체조와 같다. 강렬하고 힘이 있다. 체조의 기술마다 난이도 점수가 있기에 그것을 정확히 구현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김재인은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또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언급하고 그 사람의 그름을 지적하는데도 망설임이 없다. 당연히 사회에 대한 비판도 시원시원하게 한다. 곳곳에 냉소가 있고 자신의 확신이 넘쳐난다. 들뢰즈에 대한 찬사도, 스스로 자신을 들뢰즈 빠라고 칭할 만큼 확고하다. 자신이 학자로서 이뤄낸 것에 대한 소개 또한 예의상 약간의 겸양을 곁들일 뿐, 망설임이 없다.
용도
사실 이 책을 단순히 들뢰즈의 입문서로 보는 건 무리다. 그러니까 도서관의 사서나 서점의 직원이 <철학 일반> 코너나 <교양 철학> 코너에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다행히 부산 남구 도서관엔 들뢰즈 관련 서적과 한데 모아 분류되어 있었다.) 이 책은 일종의 부록이다. 그의 박사 논문과 앞서 언급한 두 개의 번역서에 담지 못한, 아니 어쩌면 담았었어야 할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우선은, 당연하게도 들뢰즈 철학 전반에 관한 소개가 담겨 있다. 물론 우노 구니이치나 고쿠분 고이치로, 서동욱의 입문서 하고는 다르다. 이들은 친절하다. 목차와 세부 목차의 구성에 엄청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반면 이 책은 부록을 제외하면 목차는 세 개뿐이다. 첫 번째 강의, 두 번째 강의, 세 번째 강의.
당연히 구어체로 되어 있고 전개 또한 거침없다. 그러나 놓치는 건 없다. 아니 정말 놓쳐선 안 되는 것,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것만큼은 꼭 알고 넘어가야 하는 건 정확하면서도 쉽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그렇기에 들뢰즈의 이론이나 개념을 차곡차곡 외운 뒤, 그것들을 어디 가서 멋지게 써먹고 싶은 사람이나 자신의 에세이나 잡글에 그럴듯하게 인용하고 싶은 사람에겐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대신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고 싶은 사람(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삶의 변화를 주고 싶은 사람, 이 사회와 현실을 다르게 보고 싶은 사람에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이다.
더불어, 그의 두 책의 번역에 의문을 갖고 있었던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를 통해 들뢰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는 개념이나 이론을 설명하다가 더 깊이 들어갈 즈음 멈춰 서서 “아, 좀 더 자세한 건 말이죠. 제가 논문을 쓴 게 있거든요. 그걸 보세요. 지금은 다음 얘기로 넘어가기도 바빠서.”하는 투로 논지를 자른 후 자신이 쓴 논문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논문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링크까지 소개하고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야말로 “츤데레 스타일” 아닌가?
이 책이 더 재미있는 건, 그의 동료 학자(저자가 그들을 동료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을 부를 다른 용어가 있을까?)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지적이다. 칭찬할 건 칭찬하고 지적할 건 지적한다. 그중 이진경에 대한 비판은 아주 날카롭다. 솔직히 어느 바닥이나 그렇겠지만 학교 사회라는 곳은 더욱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곳-학회 때마다 마주칠 사람의 책과 논문,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어디 쉽겠나? 게다가 한 치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고, 내 스승의 친구의 제자이고, 내 제자의 친구의 스승이고 하니 더 그렇다. -이다. 그래서 학회에서 논문에 대한 비판은 그야말로 가뭄의 콩 나듯 하고 저서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이런 한국 학계의 분위기에서 이렇게 거침없이 말과 생각을 질러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누구와 논쟁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독하게 공부했다는 의미 아닐까?
책 내용에 대한 요약은 하지 않으련다. 이미 요약된 책을 뭘 더 요약하겠나? 다만 이것만큼은 나를 위해, 또 이 글을 위해 남기려 한다.
들뢰즈는 생각의 새로운 상을 만들려 했다는 것을, 종교적 권위주의와 사제 권력과 유사한 이성 중심의 철학과 주어진 대로만 살기를 강요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어 있는 존재로 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가 될, 그 상을 만들려 했다는 것을.
그 상을 가진 자들은, 배우고 깨달은 자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지 않고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절망 속에서 잠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주어진 이 하루를, 이 순간을 만끽하며 전력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이 세상이 강요하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곱고 깊게 파인 홈을 따라, 그 경로를 따라 흐르는 고운 물이 되기를 거부하며 폭우 때마다 등장하는 거친 폭포처럼, 인간이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보를 헤치고 나가는 홍수의 전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살면, 나와 그대와 우리가 그렇게 살면 언젠간 세상이 바뀌리라 기대하며 살지만, 설령 그런 혁명과 변혁이 내일, 사는 날 동안 올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오늘 해야 될 작은 변화를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런 것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족
난 그의 번역서 두 권을 갖고 있은지 몇 년 됐지만 펼쳐 보지 않았다. 그의 저서 몇 권을 최근 구입했다.
그는 요즘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학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그가 들뢰즈와 같은 프랑스 학자들에 대한 연구와 번역에 매진해 주길 바라지만, 그러기엔 그의 학계에서의 "직업적" 위치가 여의치 않은 듯하다. 참고로 저자는 11월 2일, 부산에 있는 부경대학교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한다. 발표 제목은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힘을 확인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