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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8. 2024

증오의 역습 - 라인하르트 할러

동해선에서 읽은 책 100

심연

막심 샤탕의 소설 <악의 심연>엔 특별한 시장, “기적의 궁전”이 나온다. 막심 샤탕은 한 노파의 입을 빌어 그 시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죄악이 다 모이는 곳이지.” 노파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 대해 들어본 적 없어? 온갖 천박한 인간이 모이고 온갖 사악함이 판을 치며 죄악에 물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곳 말이야. 거기가 바로 기적의 궁전이야. 은밀하고 타락한 성소, 순결한 피를 먹고사는 사람들의 영역. 이 도시가 사악한 영혼들의 괴수라면 기적의 궁전은 그 심장이지. 악마 들린 사람들이 얻는 왕관이야.” 노파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주인공 브롤린은 연쇄살인마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그 “시장”으로 들어간다. 지하 저 밑에 있는 시장으로. 브롤린은 그 시장에 가기 위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쉴 새 없이 꺾이는 모퉁이, 음침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그는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범인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뒤 범인을 잡으면 “악의 심연”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악의 심연>의 그 시장을 떠올렸다. 세상의 어떤 빛도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한 시장. 우리의 발밑, 도시의 지하, 일상이 멈춰 선 시간에만 존재하는 그곳을.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모두가 입에 올리고 뉴스에서 거의 매일 접하는 단어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가 말했듯이, 어느 누구도 깊이 알려하지 않고 탐구하려 하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감정과 그 어두운 깊이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더 나아가 그 감정들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한 사건과 그 사건의 가해자의 “심연”에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보는 책이다.


“증오와의 싸움에서 ‘앎’은 우리에게 아주 강력한 힘이 되어 준다. 이 사악하고 차가운 감정을 억누를 힘은 ‘지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감정에 대해 안다는 것

우린 “어둠”에 대한 성찰을 터부시 한다.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 그 어둠에 대해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나열한 책도 몇 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본인이 읽을 책으로는, 콜린 윌슨의 <잔혹-피와 광기의 세계사>, 애덤 모튼의 <잔혹함에 대하여-악에 대한 성찰>,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가 있다. 범위를 좀 넓게 잡으면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스의 눈물>과 <에로티즘>도 인간과 인류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대신 그것이 일으킨 현상에 주목한다.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심박수가 빨라지며 밤에 잠을 못 자고, 운전을 하거나 직장에서 예상치 않은 순간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증세”를 짜증이나 스트레스로 뭉뚱그려 말한다. 짜증과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포섭된 증세들은 힐링과 위로라는 약을 찾아 주체를 밖으로 내몬다. 이런저런 모임에도 가고 종교 행사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위로와 안부를 묻는 유사 심리학 책 따위도 열심히 읽는다.


그런 건 일종의 대증요법(對症療法)이다. 병의 원인은 고치지 않고 증상만 수습하는 싸구려 감기약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금세 효과가 나는 것 같으니, 당연하게도 긍정을 얘기하고 위로를 말하는 모임과 책은 더 많아진다. 바바라 애런라이크가 <긍정의 배신>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모임과 책을 전전하는 행태는 <8백만 가지 죽는 방법>에 등장하는 탐정 매튜 스커더가 수사 중에도 수시로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들락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증오로 가득한 사람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행동한다..... 이성이 증오를 조종하고 움직이게 한다면, 감정은 거기에 파괴적 힘을 싣는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파괴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에리히 프롬     


감정의 이름

서평단에 응모를 하고 이 책에 기대를 했던 건 증오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책을 받기 전이니 이 책에선 증오만 다루리라 여겨 다른 부정적인 감정의 정의를 스스로 조사하여 저자가 내린 증오의 정의와 비교하여 알려했다.


이 책을 받기 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찾아보리라 마음먹었던 감정들은 분노, 혐오, 화와 같은 것들이었다. 책을 받고 안을 들여다보니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파괴적인 감정을 낱낱이 열거하여 분석했다. 마치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처럼, 그 제목의 뜻처럼, 인간과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것들 중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들의 주요 수배자들을 소환하는 것처럼.     


덕분에 내가 과거 가졌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됐다. 이 책을 읽기 전, 그 감정이 증오인지, 혐오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화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상처이거나 실망이거나 후회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대와 이십 대, 그리고 삼십 대 시절 가졌던 감정들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꺼내어 살펴본 후 차례로 보내줬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림처럼 내 과거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소란과 분열과 폭동과도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삼십 대 중반부터 차근차근 꺼내어 십 몇 년에 걸쳐, 책을 메스 삼아 도려내어 보내줬다. 마음의 평화는 그제야 찾아왔다. 오십이 넘어서. 이 책은 그 보내줬던 감정들에게 뒤늦은 이름을 붙여줬다. 덕분에 난 그 감정들의 이름을 부르며 재차, 말끔히 보내줄 수 있었다.      


사건을 말한 이유

인셀과 그들이 벌인 사건들은 알고 있었지만 재차 잔혹함을 던졌다. 유사한 사건들이 다른 형태로,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저 잔혹함이, 저 잔혹함의 근저가 되는 증오가 더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 온라인을 통해 증오는 더 쉽게 증폭되고 더 쉽게 쌓인다. 그리고 그 쌓인 것들을 누군가는 고스란히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불쏘시개 삼는다. 그 불은, 그 화염은 어디선가 예고 없이 터진다. 도쿄 아키하바라 사건이나 콜럼바인 사건 같은 그리고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순천에서 일어났던 “묻지 마 살인”과 같은 거대한 폭력이.     


저자는 우리에게 도구를 준다. 증오를 만드는, 자기 파괴적인 심리의 근원이 되는 것들에 대해, 자아가 파괴된 사람들이 모여 더 큰 파괴적 존재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 자아최적화, 반향실 효과, 창피 주기, 몸매 조롱과 같은 단어들은 내게 있어 익숙하면서도 그 정의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거나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더불어, 앞서 말했듯,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섬세하게 구분하여 이름을 붙여 우리에게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그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겨내는 법도 설명한다.      


이 책 속엔 부정적인 감정들과 함께 그 감정들이 원인이 된 잔혹한 사건들도 등장한다. 이 사건들은 잔혹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르완다와 유고 내전에서 일어났던 제노사이드, 히틀러가 자행했던 홀로코스트, 볼셰비키 혁명에서 일어났던 피의 숙청들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형사 사건들도 소개된다. 수백 명의 범죄자들을 인터뷰한 프로파일러라도 반추하기 힘든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 그저 사건의 요약이 아니라 그 “심연”까지 파헤쳐 보여줬다.     


다시 지상으로

이유는 간단하다. 막심 샤탕의 소설로 다시 돌아가보자. 브롤린은 정보를 얻고 나와 살인마를 추적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해결한다. 라인하르트 할러가 어두운 감정과 그 감정이 원인이 된 사건들을 나열하기만 했다면 앞서 언급한 악에 관한 책들의 연장선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정보를 얻었다면, 심연에 대해 알았다면 그것을 몰아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심연에 대해 들여다보고 명확히 알고 대비하자. 이겨내자." 이 말을 하기 위해, 길고 긴 어두운 감정들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독자와 함께 걷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터널의 끝, 그 마지막 장은 당연히 이겨내는 방법이다. 그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인지하기&인정하기”와 “솔직하기&이름 붙이기”, 그리고 “놓아 버리기 또는 툭툭 털어 가벼운 마음가짐”에 특히 공감했다. 내가 지난 십수 년 간 했던 것들이었다. 여기서 이름 붙이기만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이름을 붙여 보내줄 수 있었다.


사족

저자는 미하엘 콜하스의 이야기를 편집증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공교롭게도 이 책 직전에 읽은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에서 김재인 교수는, 미하엘 콜하스를 '탈영토화를 향한 끊임없는 시도'의 전형으로 소개한다. 서로의 입장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이렇게 다르게 읽힌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됐다.


뭐, 별 거 아닐 수도 있는데, 출판사의 로고가 특이하다. 처음엔 책이 누워 있을 땐 I C K로 읽었다. 출판사 이름은 <책사람집>인데 영어로는 다른 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세워놓고 다시 읽으니 <츶>으로 읽혔다. 이 또한 출판사 이름하고 그 맥락이 닿지 않아 난감해하면서 다시 들여다보는데, 세 개의 기호가 각기 책과 사람과 집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뭐, 진짜 별 거 아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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