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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1. 2024

인생, 그냥, 씨~게 가는 거죠.

수영장에서 건진 생각 74

백발의 어르신     

9월, 우리 반에 새로 합류한 어르신이 있다. 그 어르신은 9월 첫날, 고급 B반의 1번과 풀 밖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다. 다른 수영장, 혹은 다른 시간대에서 오셨기에 자기 수준에 맞는 레인을 물으셨던 모양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B반 1번의 설명은 상세했던 모양이다. 어르신은 잠시 생각하시는 듯하다가 우리 레인을 선택하셨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려나?     


이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우리 레인에선 내가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 나를 기준으로 50대 무리가 서너 명 있고, 40대와 30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원이 열다섯 명으로 알고 있는데, 고정적으로 나오는 사람은 대략 열 명 안팎이니 이 나이의 비율은 언제나 고정적이다.      


어르신은 이 균형을 단박에 깨트릴 만한 연배로 보였다. 예순은 당연히 넘었고 일흔도 넘어 보인다. 여든까지는 안 되는 것 같고. 여하간 어르신은 완전한 백발에 숱이 적었다. 오랫동안 운동을 꾸준히 하셨는지 나이에 비해 배도 안 나왔고 몸 여기저기에 근육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따라올 수 있을까? 의심이 됐다. 처음엔 내 뒤에 서는 젊은 여자 회원들 뒤에 자리를 잡으셨다. 약간 느리긴 했지만 쉬는 랩은 없었다. 당연히 거르는 세트도 없었다. 분명 우리의 평균 속도보다 느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쳐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들지 않으시려나? 며칠 해 본 뒤엔 반을 바꾸시겠지?     


그야말로 기우였다. 어르신은 한 달 내내 우리와 함께 운동을 했다. 심지어 우리 속도의 감을 잡으셨는지 처지는 거리도 짧아졌다. 순번도 빨라져서 이젠 종종 내 뒤에 서곤 하신다. 하체 근력의 문제 때문인지, 핀 수영을 하는 날, 핀을 안 끼고 일반 수영으로 함께 하는 걸 제외하면, 그야말로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의 실력과 체력이다.      


그렇게 어르신의 활약을 본 어느 날, 나와 1번은 라커룸에서 짧은 대화를 했다. “야, 이거 어르신 보니까, 반성하게 되네. 수영 이거 환갑까지 하겠나 싶었는데, 그만두려면 한참 남았네.”하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모. 우린 아~직 멀었다. 열심히 해야 돼.”하고 1번이 말을 받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덩치 좋은 2번도 맞장구를 쳤다. “한 바퀴도 안 쉬신다, 아입니까. 마, 부끄럽구로.”


23학번의 풀 악셀

언젠가 얘기했듯이 수영장은 평등하다. 나이를 무기로 휘두를 수 없는 곳이다. 나이를 먹어 힘들다고 좀 천천히 가자, 운동을 조금만 하자고 조르는 사람은 반을 옮기거나 시간을 바꿔야 한다. 최소한, 내가 다니는 수영장에선 그렇다. 우리 강사도 그걸 알기에 체육학과 학생들이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우리 반으로 보낸다.      

9월 달엔, 예전에 종종 오던 여학생이, 핀 수영을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다. 핀 수영은 내가 1번을 서는데, 그 여학생의 순번이 점점 올라왔다. 앞에 사람과 간격이 너무 좁혀지다 보니 위에서 보던 강사가 순번을 계속 올려줬던 것이다. 그 친구의 운동량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다 내 뒤 번까지 왔고, 수요일마다 2번을 서주는 덩치 좋은 회원과 번갈아 가면서 1번을 하면서 그 친구의 스피드를 유지해 줬다.      


그렇게 몇 번의 세트가 끝나고 잠시 쉬는 동안 몇 학번인지 물었다. 23학번이라고 했다. 내가 농담을 했다. “이야, 이거 잘하면 학생 엄마 아빠보다 내가 더 나이가 많겠는데?”, 그러자 그 여학생이 “엄마는 좀 젊으신데, 아빠는 좀 연세가 있으세요.”했다. 불쑥 궁금해져서 몇 년생이시냐고 물었다. “엄마는 79년생이고, 아빠는 73년생이세요.”, “에? 아빠가 나보다 어리시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회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스무 살은 오십 대를 봐주지 않는다. 오십 대도 스무 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수요일마다 오는 그녀를 강사는 아예 1번으로 보냈다. 한 번 전력을 다해보라는 의미다. 전력을 다해도 용서가 되는 레인이니까. 당연히 그녀는 풀 악셀을 밟았다. 전속력이다. 전력을 다한다. 우리도 전력을 다해 따라붙는다. 그녀는 몇 번까지 들어온 뒤에 출발해야 되는지 눈치를 봤다. 내가 보고 있다가 적당하다 싶을 때 조용히 말해줬다. “갑시다.”, 그녀는 어뢰처럼 튀어 나갔고, 나도 따라갔다.


나이로 그어놓은 한계

추석 연휴가 끝난 목요일, 어르신이 수영장에 오셨다. 수영이 끝나고 어르신이 라커룸에서 회원들과 몇 마디 나누셨다. 몸무게가 80킬로그램인데, 이젠 무릎이 못 견디는 것 같아서 살을 좀 빼야 한다. 추석 때 지인들을 좀 만났더니 3킬로그램이 쪘더라. 다들 살이 찌지 않았냐.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무릎이 아파서 선택한 운동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수영도 섹스도, 한 환갑까지는 안 하겠나, 생각했었다. 한 십 년 정도 남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렇게 할 때마다 전력을 다해,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정도 남았으리라 짐작했다. 착각이었다. 어르신이 몸소 보여줬듯이 더 할 수 있다. 몇 살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큰 탈만 없으면 환갑을 넘어, 몇 년은 더 할 수 있다. 그런 용기를 얻었다.      


이 나이에 나보다 삼십 년 어린 사람들과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축복이다. 요즘 청춘들의 성향 탓인지는 몰라도, 어른의 나이, 나이 먹은 어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는 것이, 내 입장에선 고맙다. 함께 운동하는 동안, 우린 잠시 나이를 뛰어넘어 동료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왕 하는 거, 아직 할 날이 많이 남았다는 걸 확인한 김에 조금씩이라도 나아지자 하는 마음도 다잡았다. 추석 연휴 기간, 수영장이 쉬는 동안, 집에서 이틀 정도 운동을 했다. 처갓집에 차례 음식을 하러 아내와 딸이 갔던 월요일엔 집에 있는 도구로 근력 운동을 했다. 딸은 <해리포터 레가시>라는 게임을 하러 광안리 삼촌 집에 놀러 가고 아내는 넷플릭스를 보며 쉬던 수요일엔 타바타 앱으로 유산소 운동을 했다. 이렇게라도 근력과 심폐지구력을 유지시켜 놔야 다시 수영장에 갔을 때 헐떡거리지 않을 것 같아서다.     


목요일, 웜업 자유형을 하는 동안엔 수영 전문 채널에서 본 동영상이 가르쳐준 자유형 손동작을 실험해 봤다. 그 영상에선, 스트로크를 끝낸 손을 다시 물에 넣을 때 새끼손가락을 살짝 벌려 넣은 뒤, 물을 잡아당길 때까지 그 틈을 유지하면 견갑골이 활성화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지 영상만 봐선 알 수 없으니 직접 내가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접 해봤다. 어땠냐고? 다른 것 같다. 앞으로 계속 실험해 봐야지. 효과가 좋으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9월도 열흘 정도 남았다. 우리 팀은 긴 불황의 터널을 나와 엄청 바쁜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이 일, 좋아하는 이 일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다. 감독이나 나나, 조명감독이나 지미집 감독이나, 다들 힘들다고 하면서도, 몇 년 안 남았다고 하면서도 은퇴 시점에 대해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하는 데까진 해봐야 안 되겠나, 그런 마음들 인지도. 언젠가, <유퀴즈>에 나왔던 배우 류승범의 말처럼, “인생 그냥 씨~게 가는” 건지도 모른다. 힘이 닿는 한, 그 나이에 주어진 힘을 최대한 쓰면서 그렇게 “씨~게”, 그러니 더위가 물러가는 요즘, 마음먹었던 뭔가를 바로 하시길, 그게 뭐가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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