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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최카피의 딴생각 - 칼럼 158

by 최영훈

청춘을 보며 드는 걱정

요즘 30대 후배의 권유로 새로 시작한 SNS를 통해 치열하게 사는 청춘들의 양상을 엿보곤 한다. 여기저기서 MZ라는 말로 싸잡아 부르며 잔소리와 우려를 들었는데, 내가 본 들여다본 이들은 그 소문과 달랐다. 다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있다. 취미도 많고 유행 따라 그 취미도 잘 바꿔 따라간다. 그 바쁜 와중에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친구와 가족도 챙긴다. 처음엔 너무 변덕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최근엔 생각이 바뀌었다. 저 때 아니면 또 언제 저렇게 마음 가는 데로 심신의 에너지를 쏟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쉬기는 하는 건가, 하는 걱정은 든다. 매일, 매 순간 저렇게 전력을 다하면 금세 소진 되진 않으려나, 그야말로 번아웃이 오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청춘들은 그런 걱정이 없는 듯하다. 요즘 나오는 광고에 등장하는 청춘들은 이런 자신들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이 중 써모스 텀블러 광고는 요즘 친구들 말로 “갓생”을 살기 위해 매일 전력을 다하는 청춘들의 일상과 속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광고 속 청춘은 지키는 루틴이 많다. 일어나면 군인처럼 잠자리를 정리한다. 매일 달리기를 한다. 바쁜 아침, 잠시 짬을 내 영어 단어를 외운다. 아무거나 먹지 않기 위해 끼니때마다 뭘 먹었는지 사진을 찍어 기록한다. 그렇게 모든 루틴을,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고 맞은 저녁,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만 같다. “내가 자랑스럽거나, 사랑스럽거나.”, 마지막 카피가 나온다. 그런데 필자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불안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더불어 요즘에 자주 보이는 두 단어는 필자의 이런 불안과 안쓰러움을 배가 시킨다.


0 린이 와 0 친자

특정 취미를 가진 사람 중 그 실력에 따라 호칭을 달리할 때 쓰곤 하는 말이 “0 린이”와 “0 친자”다. 앞의 말은 어린이에서 “린”을 빌려와 합성어를 만든 것이고 뒤의 말은 미친 자에서 “친”을 빌려와 합성어를 만든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수영을 예로 들면 이제 막 수영을 시작한 사람은 “수린이”, 어느 정도 레벨에 올라갔거나 필자처럼 일주일에 서너 번 수영장에 가는 사람은 “수친자”라 부른다. 다종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는 청춘들은 “0 친자”라는 호칭을 듣고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듯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친자”라는 말을, 수영을 시작한 사람은 “수친자”를,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은 “런친자”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에게도 듣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독서모임에 몇 개씩 나가고 한 달에 수십 권의 책을 읽고, 그걸 기록한다. 과거의 사법 고시생 같다. 달리기를 시작한 청춘은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비용을 아낌없이 달리기 장비에 투자하고 지역에서 소문난 러닝 크루에 가입한다. 그렇게 뭘 해도 제대로 하고 싶고, 열정을 쏟아붓고 싶고 그로 인해 그 분야에 미친 자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기 위해 시작부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런 말을 들으려면 어떻게,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그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작할 때부터 그야말로 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일 테다. 마치, 오직 속도를 내기 위해 개조된 두 대의 차량이 딱 4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려 승부를 겨루는 드래그 레이스에 참가한 드라이버처럼 말이다.


전속력이 표준속도는 아니다.

설령 그것이, 그러니까 이렇게 매 순간 “미친 자”처럼 살아내는 것이 정상적인 청춘의 삶이라 해도 남아 있는 생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한 분야나 어떤 일이나 취미에 마음이 끌려 발을 담근 뒤, 한창 열정을 쏟아부으며 기술과 기량을 급속히 성장시키는 시기가 있으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후엔 그것의 맛과 깊이를 알아 느긋이 그 참맛을 음미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만끽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로 느껴질 만큼 당연하다. 전자의 시기가 성장과 발전의 시기라면 후자의 시기는 수양과 깨달음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자의 시기를 사는 사람은 전자의 시기를 사람이 초보자 시기의 가파른 속도로 인해 못 보고 지나치는 뭔가를 통찰하여 가르쳐 줄 여유가 생기곤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엔 그 각 시기의 시간적 길이와 그 시간 동안 쏟아야 될 적정한 열정의 크기나 강도를 가늠할 수 없다. 더불어 자신의 에너지의 총량 또한 아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두 가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을 사는 모든 이들의 난제 중 난제일 것이다. 이 난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이 불명확함을, 시간의 양과 열정의 크기와 강도, 그리고 내게 갖고 있는 체력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매 순간 전력을 다하며 사는 사람은 위태로워 보인다. 자신만의 페이스를 알지 못한 채, 일단 힘이 닿는 데까지 전력을 다하는 청춘을 볼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드는 이유다. 자유형으로 가야 할 거리가 1킬로미터인데 출발부터 50미터 단거리 선수처럼 전력으로 킥을 하고 스트로크를 하는 선수를 지켜보는 코치와 비슷한 마음이다. 철인 3종 경기에서 첫 번째로 하는 종목인 수영에서 너무 오버 페이스를 해서 행여나 사이클 40킬로미터와 달리기 10킬로미터는 엄두도 못 내고 시합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까, 초조해하며 선수를 바라보는 코치의 마음과도 같다.


청춘에게 보내는 안부와 당부

한가하게 사는 사람이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전력을 다해 사는 청춘들에게 별 도움 안 되는 조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 같은 조언, 당부 같은 부탁을 하자면, 너무 자기를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린 4백 미터만 달리면 되는, 자기 속도를 못 이겨 뒤집어지고, 심지어 엔진이 터지기까지 하는 드래그 레이스에 참가한 자동차가 아니다. 인생은 그런 단거리 대회가 아니다. 자동차 대회에 비유하자면 3주가량 험난한 지대를 가로지르는 다카르 랠리와 비슷하다. 자동차의 내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르망 24시 레이스와 비슷하다. 자전거 대회에 비유하자면 매년 여름 3주간 펼쳐지는, 알프스 산맥과 도시와 고즈넉한 중세 도시를 두루 들르며 프랑스를 관통해 나아가는 투르 드 프랑스와 닮았다.


마지막으로, 청춘들에게, 자신을 닦달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른 광고의 카피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국민 엄마 김혜자 선생님이 출연하신 네이처 메이드 광고다. 카피는 이렇다. “대단치 않은 하루여도 괜찮아. 그저 하루하루를 잘 채워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일이니까.”, 이 카피를 아이를 키우기 전에 들었다면 별 감동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아침에 나간 사람이 저녁에 무사히 돌아오는 그 당연함이 행복의 첫 번째 단추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 저 카피를 후회 속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청춘에게, 그 후회 끝에 내년에 더 열심히, 꽉 채워 살아내겠다고 다짐하는 불안한 청춘에게 안부 인사로 보낸다.


<최카피의 딴생각>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가장 최근 것과 가장 예전 것을 교대로 올릴 생각입니다. 읽으면서 그 시간의 간극과 함께, 각 시간 속에 있었던 사회의 풍경과 저의 생각을 음미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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