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4 - 딥 임팩트(1998)
딸이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12월 마지막 주의 일요일 오후, 병실의 TV를 틀자 <딥 임팩트>가 상영되고 있었다. 마침 필자가 좋아하는 시퀀스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주선이 폭파로 분쇄시키지 못한 혜성 하나가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해안 도시에 사는 이들은 혜성 충돌 이후 발생할 대형 해일을 피할 수 없었기에 미국 정부는 추첨을 통해 일부를 특정 장소에 대피시켰고, 선택되지 못한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어디론가 정처 없이 대피를 하고 있다. 그때, 선택된, 혜성을 처음 발견한 소년의 가족은 정부가 제공한 군용 차량으로 이동을 하고 있고 소년의 여자 친구는 그녀의 가족과 함께 대피를 한다.
그렇게 각자의 상황에 따라 대피를 하던 중, 소년은 여자 친구를 찾아 함께 대피하겠다고 부모에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뒤엉킨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여자 친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찾는다. 잠시 후, 소년의 목소리를 들은 여자 친구는 소년과 재회한다. 소년의 모터사이클을 본, 자동차로는 제 때, 적합한 장소로 대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소녀의 부모는 아직 아기인 막내 동생을 소녀에게 맡긴 후 갖고 있던 현찰을 다 주면서 소년과 함께 최대한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한다. 소녀는 울며 거절하지만 결국 부모에 떠밀려 모터사이클을 타고 산을 오른다.
이 시퀀스에는 다른 이들의 사연도 삽화처럼 삽입된다. 대형 혜성을 핵폭탄으로 분쇄시켜 지구를 절명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돌진하기로 마음먹은 우주인들의 결연함, 방송국의 마지막 헬리콥터에 탈 인원에 선발되지 못한 선배 직원과 그녀의 어린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평소 인연을 끊고 지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어린 시절 추억이 남아 있는 해변으로 달려가는 방송인, 우주인과 가족과 나누는 최후의 인사. 이런 내용들이 함께 교차되어 전개된다. 그 후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여 해일이 발생하고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
내가 본 부분은 딱 이 부분이었다. 이후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 재난 영화가 아니었던가? 가족 영화였나? <아마겟돈>이나 <코어>처럼 지구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고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그런 장엄한 인류애가 담긴 영화가 아니었던가? 내가 본 시퀀스만 떼어놓고 보면 분명 그런 종류의 영화가 아닌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영화 전체 내용을 되짚어 봤는데, 역시 이 영화는 재난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전반엔 우주에서 날아오는 혜성이 주는 긴장이 흐르고 있지만 그 긴장의 팽팽한 선 위에 그려진 드라마의 음표는 사람과 가족 이야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뒤, 제목을 다시 생각해 봤다. Deep Impact.
임팩트의 사전적 정의는 충돌이고 자극이며, 효과이자 영향이다. 효과를 일으키는 충돌이고 영향을 주는 자극이다. 이렇게 단어의 뜻을 곱씹다 보니 인생은 임팩트(Impact)의 연속임을 새삼 깨달았다. 살면서 겪는 임팩트가 어디 한두 개이던가. 어쩌면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부터 임팩트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만 어떤 임팩트는 모두들 겪고 있기에 임팩트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일 테고, 어떤 임팩트는 남과 구분되어 인식될 정도로 특수하고 특이한 것이어서 크게 다가오고 평생 기억에 남는 것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어떤 임팩트는 임팩트라 인식되기도 전에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고, 어떤 임팩트는 유독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이리라. 이렇게 서로의 기억 속에 남은 사건이 다르고, 같은 사건에 의한 임팩트의 차이가 있 보니 우리는 서로의 사건과 임팩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타자의 중요한 사건과 나에 중요한 사건, 타자의 별 것 아닌 사건과 나에 중요한 사건 사이의 다름과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나와 타자의 그 다름의 형성 원인 중 하나가 서로 다른 사건과 같은 사건의 임팩트 차이로 인한 것인 것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감기 같은 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취를 하며 맞은 첫겨울에 맞이한 감기는 인생의 강한 임팩트를 남길 것이다. 또, 인생의 첫 번째 술자리도 기억에 남지만 무수하게 이어진 술자리 중 특별한 누군가와 함께했던 어느 술자리가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연애도 이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다양한 사건이 무수히 반복되지만 해석은 개별적이기에 사건이 남기는 임팩트 또한 제각각이다. 결국 사건의 다름이 다른 인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남긴 임팩트, 그 임팩트의 누적이 다른 인생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과거는 뭔가를 소유한 사람이 누리는 사치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유사한 사건을 겪어도 그 모든 사건이 기억에 저장되는 건 아니다. 신문에 실린 누군가의 부고(訃告)는 아무런 동요를 일으키지 않지만 지인의 가족이나 동료의 가족의 부음(訃音)은 마음을 흔든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나 사건일수록 마음에 일으키는 파도는 커지기에 잔잔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충분히 곱씹고 아파하고 애도한 뒤에야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랬다. 살면서 몇 번이나 타인의 죽음과 마주했다. 미국에서 오지 않겠다는 자식 대신 어느 백인 신사의 상주도 해봤고 교회 후배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땐 막 녹기 시작한 2월의 산길을 무거운 관을 들고 올라가도 가봤다. 중병에 걸린 사람의 소식도 많이 전해 들었다. 제법 가까운 사람 중 암 환자가 세 명이나 있었고, 그중 두 명은 현재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뿐인가. 결혼을 한 뒤에는 처가 식구들이 한 번씩 병원에 입원하여 마음을 졸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 들었던 마음은 처나 자식이 아플 때 드는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올 겨울, 딸의 항암치료라는 긴 터널에 막 들어가 보니, 그 다름이 더 절감된다. 딸의 병실에서 연말연시를 보냈다. 제법 큰 대학병원의 입원 병동엔 환자와 보호자들이 많았다. 이들에겐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도, 새 해를 맞는 기쁨도 없어 보였다. 환자의 차도에 일희일비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보호자 없이 입원 생활을 할 수 있는 통합병동의 환자들은 더 고독하게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었다. 이들 모두, 완치가 되면 2024년의 끝과 2025년의 시작이 임팩트 있게 기억될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새해에는 임팩트 없는 한 해가 되시라는 이상한 덕담을 하고 싶어졌다. 감당할 만큼의 잔잔한 기쁨과 돌아서면 잊을만한 사소한 고통들만 있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행여나 혼자서는 감당키 어려운 불행이 오더라도 가족과 함께, 베링해의 높고 차가운 파도를 견디는 대게 잡이 배와 같은 단단하고 튼튼한 희망을 앞세워 우리의 일상을 얼어붙게 하는 불행을 헤쳐 나가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가족과 함께 했기에 작은 기쁨은 배가 되고 고통은 반감되어, 결국엔 한 해의 끝에서 돌아보면 기쁨만 가득한 한 해였구나 하고 여겨질 그런 2025년이 되길 빌어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무탈한, 잔잔하고 평온한, 임팩트 없는 한 해가 되시라.
얼마 전 보낸 칼럼 원고를 일부 수정했다. 설을 앞두고, 이 글로 새해 인사를 대신한다. 사진은 울산 북구의 어느 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