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30
2007년, 아니면 2008년일 것이다. 봄인지, 가을인지, 여하간 대전의 모교에서 두 타임의 강의를 끝내고 대전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 저녁이라 비교적 한산한 플랫폼에 한 여자가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난 무심히 그 여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차를 타고 가 만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건가, 그렇다면 굳이 이런 곳, 이런 순간에 통화를, 그것도 영상 통화까지 할 필요 있나. 그저 몇 시 기차라고 문자 한 통 넣어주면 될 일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안 그래도 영상 통화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 기능이라고 이렇게 요란하게 그 성능을 강조하는 광고들을 해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에 2G 폰을 쓰던 사람에겐 그 영상 통화가 더 유별나 보였던 것이다.
잠시 후, 내 생각은 뒤엎어졌다. 여자가 액정 화면 너머에 있는 이에게 한 손으로 열심히 수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영상 통화 기능의 필요, 그것도 절대적 필요에 대해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이 이후로 난 광고나 마케팅 관련 강의나 강연을 하게 되면 꼭 하는 두 개의 이야기 중 하나로 이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이, 사람이 사람의 필요와 욕망을 다 알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가. 몇 번의 설문과 고급 통계를 돌려 나온 소비자 조사 결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욕망을 그 헐거운 그물코로 놓쳐버리고 있는가. 그러니 사람 앞에선, 타자 앞에선 언제나 경청의 자세와 시선을 오래 두는 자세를 잊지 말라고 말한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남녀가 수화手話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턱 높이까지 올린 한 손 두 손 쉬지 않고 움직이고
여자는 두 손 마주 잡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발길 옮기려다, 아 여자 눈에 불빛이 담겨 있구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기쁜 표정 담긴 얼굴이
손 없이 수화하듯 울고 있었다.
나는 절름을 잊고 그들을 지나쳤어.
이 책의 말미, 황동규의 시에 관한 글이 있다. 이 글에 담긴 시 중 「발 없이 걷듯」의 저 마지막 연을 읽었을 때, 한동안 잊고 있었던 대전역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아주 진지하게 영상 통화를 하던 여성의 모습이.
신형철을 안 지는 얼마 안 됐다. 한두 해 전,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그의 칼럼을 읽게 됐다. 2016년, 8월 12일, 한겨레 신문에 실린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이라는 시를 뼈대 삼아 생각을 이어갔다. 그 생각을 따라가다 마주친 마지막 두 문장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 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P.97
이 문단의 옆에 그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 인문대학에 가면 한 명쯤 있을법한 교수의 얼굴이었다. 사진으로 몇 번 봐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알아보지 못할, 얌전하고 조용한 외모였다. 그러나 그 얼굴엔, 학자 특유의 어떤, 꼬장꼬장함이 없었다. 이 양 같이 순하게 생긴 문학평론가의 글이 궁금해졌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의 다른 글은 또 어떤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심지를 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그의 평론집을 살 생각은 없었다. 이유는, 평론과 평론에 대한 평소 내 생각 때문이다. 우선, 특정 분야 및 학문의 논문이나 보고서처럼 각 분야의 평론 또한 애초에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또, 뭐랄까, 평론가라는 직군의 말과 글에는 어떤 까칠함과 삐딱함이 있지 않나. 우스갯소리로 음악이나 미술, 문학을 좋아하나 그 재능이 없는 이들이 평론을 한다고 말들을 하고 말이다.
게다가, 특히, 문학 평론가들은 수십 년 전의 작가와 소설, 시도 그야말로 파묘를 하듯 끄집어내어 이 시대의 잣대로 폄하하고 몰아세우는데 거리낌이 없는 치들 아닌가. 어려운 이론과 난해한 단어들로, 가슴을 치며 읽었던 소설과 시들을 냉정하게 해부하는 이들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이제까지 문학 평론이라는 것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자료를 찾다가 어쩔 수 없이 읽은 적은 있어도 그 글이 모인 책을 돈 주고 사서 읽은 적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몰락의 에티카>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 이후의 책들, 그러니까 에세이라 할 수 있는 책들에 눈길이 갔다.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 그의 이름과 책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고 서점에서 차례를 보고 파라락 넘겨 읽다 보니, 앞의 문단이 등장한 칼럼이 들어 있는 책임을 알았다. 게다가 그야말로 동서고금의 시를 글과 생각의 줄기로 삼는 책 아닌가. 그런 이유로 여러 권 꽂혀 있던 그의 책 중에서 이 책을 가져왔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아이를 잃은 부모가 갑자기 독실한 신앙인이 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P.44
욥기의 한 장을 소재 삼이 전개한 글의 마지막 문단이다. 이 문단은 앞에 인용한 글의 마지막 문단과 호응한다. 인간이 한 인간을 위해 사랑을 발명하지 않으면, 그래서 한 인간이 자신으로 향하는 단 하나의 사랑도 발견하지 못하여 살아야 할 이유를 망실하여 삶을 끝내는 것을 당연시 여길 때, 그 끝냄을 선택의 문제가 아닌 당연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그 한 인간을 계속 살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신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어쩌면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의 글엔 이러한 연민과 사랑, 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있다. 시인과 그 시인의 시를 대하는 이런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평론가의 입장과 함께, 한 명의 독자이자 후배 혹은 선배, 팬의 마음이 겹쳐 있다. 조국의 아픈 역사를 함께 아파하며 시를 쓴 선배에 대해선 존경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있는 선배에 대한 애잔함과 안쓰러운 마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을 볼 여러 매체의 독자와 독자들이 살아내는 동시대의 아픔을 오래 보고 깊게 보는 시선도 있다. 그렇다고 섣불리 위로하지도, 충고하지도,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가 욥기를 소재로 한 글에서 불러들인 욥의 친구들과 같은 수많은 학자와 작가와 평론가들이 쉽게 하곤 하는 그 주제넘은 짓을 그는 하지 않는다. 그 교만하면서도 오만한,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과 저열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런 선을 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말을 건넨다. 심지어 들어주는 것 같다. 분명 글을 써서 세상에 자신의 말과 생각을 내놓는데, 그걸 읽는 사람은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불러낸 시인과 시들 또한 다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 같다.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시를 써준 것 같고 지금도 내 곁에서 내 삶과 이야기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글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는 어쩌면 말함이 아니라 들음이 아닐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일까, 애초에 이삼일이면 읽어 내리라 생각했고, 그럴 수 있으리라 봤던 책을 일주일 넘게 붙잡고 있었다. 한 칼럼을 읽고 한참 생각하고 한 칼럼을 읽고 거실을 서성였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아내를 슬쩍 엿보거나 패드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는 딸의 빡빡 깎은 머리를 괜히 한 번 쓰다듬곤 했다. 그렇게 글을 떠나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다시 글로 돌아가길 반복하며 쉬엄쉬엄 읽었다.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싶다. 읽고 있는 내내 작가가, 글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듯한 경험을.
작가는 내 아내와 동갑이다. 그런데 그가 서문에서 직접 밝혔듯이, 2022년 1월에 아들을 봤다. 찾아보니 결혼은 2014년에 했다. 무려 결혼 8년 만에, 마흔여섯에 본 아들인 것이다. 생각해 보니 결혼도 늦다. 서른여덟에, 열 살 연하의 동종업계 사람과 했다.
이 책에 담긴 글은 대체로 결혼 후인 2016년에 쓴 글이고 그 글들을 모으고 편집하고 추가하기 위해 새로 글을 쓴 것은 아들이 세상에 나올 즈음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의 글, 아들을 보기 전의 글이 어땠는지 난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온전히 그의 성품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사랑을 준 한 여인의 온기가 더해져서인지, 난 알 수 없다.
글도 외모가 있는 것 같다. 그의 글은 칼럼에서 본 그의 얼굴과, 또 다른 곳에서 본 그의 모습과 닮았다. 정갈하고 논리적이며, 부드럽고 온화하다. 만약, 당연한 말이겠지만, 글이 쓰는 이를 닮았다면, 그래서 내 글도 그러하다면 글을 쓰기 전 먼저 자신을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든, 은유적으로든.
마지막 사족. 우연히 본 기사로 판단하건대, 그는 엄청난 사랑꾼인 모양이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인 양관식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듯. 2014년에 나온 그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속표지엔 장인, 장모의 이름을 적은 뒤, “나의 새로운 부모님들께.”라고 썼고, 그 밑에 아내의 이름을 적은 뒤, “나의 절대적인 사람에게”라고 적어서 그 업계와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