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31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책을 고르는 방법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난 요즘 크게 세 줄기로 책을 읽고 있다. 하나는 좋아하는 학자를 중심으로 철학자와 그 철학에 관한 책, 다른 하나는 학창 시절에 관심을 끌었던 학자나 내 생각과 유사한 생각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 및 작가의 책, 마지막 하나는 느닷없이 끌리게 된 학자나 작가의 책이다. 여기서 첫 번째의 경우가 중요하다. 좋아하는 학자 - 예전 학자건, 요즘 학자건 상관없이 - 에 따라 읽어가는 학자와 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경우, 요 몇 년 동안은 들뢰즈를 중심에 놓고 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여하간, 이 경우, 들뢰즈는 큰 줄기 역할을 맡는다. 알다시피 들뢰즈는 특이하게도 다른 철학자들의 입을 빌어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니 당연하게도 들뢰즈를 읽다 보면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다. 오죽하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라는 책이 편집되어 나왔겠나. 참고로 이 책은 들뢰즈가 쓴 서양 철학사가 아니라 들뢰즈가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해 그 목소리를 빌어 세상에 내놓은 글 중 소위 에세이와 논문들을 서양철학사의 연대기 순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다. 나도 있는데, 꾸역꾸역 틈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나 학자(어느 분야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를 센터에 세워 놓으면 그것을 중심으로 줄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 그 줄기들은 다시 더 작은 줄기들로 이어져서 스승에서 제자로, 혹은 제자에서 스승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혹은 현재에서 과거로 뻗어나간다. 결국 그렇게 읽어나가다 보면, 뭐랄까,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나만의 세계관 비스름한 게 구성되고, 담백하게 얘기하면 내 취향의 책꽂이가 완성된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목차를 보자. 플라톤부터 시작한다. 스피노자, 흄, 루소, 칸트, 헤겔, 니체, 베르그송에서 푸코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싫든 좋든 들뢰즈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양반들의 글이나 책, 생각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냥 들뢰즈의 글을 읽어도 되지만, 경험상 좀 알고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듯하다.
그런데, 요 목록에 없는 인물이 두 명 있다. 그러니까 책으로 출판된 그의 책에 목소리를 빌려줬지만, 앞의 책의 목차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은 소설가 프루스트, 다른 이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이 책, <철학자 들뢰즈, 화가 베이컨을 만나다>는 화가 베이컨의 그림을 생각의 축으로 삼은 책 <감각의 논리>의, 일종의 해설서다.
이 책은 전반부는 들뢰즈 이론의 핵심 개념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후반부엔 <감각의 논리>에 담긴 들뢰즈의 생각과 베이컨의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짚어 나간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홍익대와 서울대, 두 대학의 대학원 강의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저런 책의 구성이 나왔을 것이라 짐작된다. 또, 같은 이유로 전반부 들뢰즈 이론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개략적이면서 도식적이다. 그 점은 장용순의 책과 닮아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들뢰즈가 목소리를 빌린 학자와 병행하여 그 도식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일의성, 내재성, 존재와 존재자 등을 설명할 때, 스피노자-들뢰즈, 베르그송-들뢰즈, 들뢰즈, 이 세 경우를 나란히, 연이어 제시하여 들뢰즈가 독해해 낸 학자들과 들뢰즈와의 관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외에도 내재성의 평면, 사건 등을 설명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들뢰즈가 미분과 적분을 빌어 표현한 생각들이었다. 하나의 곡선이면서 동시에 찰나의 점이기도 한 인간, 주체의 삶을, 그 변화의 가능성을 응축하고 그것을 라이프니츠의 주름만큼 잘, 그리고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논의를 끝낸 후 베이컨의 그림으로 넘어간다. 베이컨의 그림을 설명하는 용어로는 형상, 윤곽, 아플라가 있다. 여기에 다이어그램이 추가된다. 이런 단어들이야, 뭐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고, 우리가 뭐 논문이나 책을 쓸 것도 아니니, 일반 독자 입장에서, 아마추어 입장에서 들뢰즈는 도대체 왜, 하필, 베이컨의 그림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베이컨의 그림을 찾아서 보라. 그림에 담겨 있는 사물이 무엇인지, 인물이 누구인지, 배경이 어디인지, 몇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얼굴을 구분할 수 있다면 무엇이 눈, 코, 입인지, 팔다리를 구분할 수 있다면 어디서부터 팔이고 어디서부터 다리인지, 의자 위에 사람이 있다면 앉는 중인지 서는 중인지, 표정이 있다면 그것이 울고 있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입을 벌리고 있다면 그것이 환희의 표현인지 고통의 표현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물에서 사람으로, 배경에서 형상, 혹은 형상에서 배경으로, 윤곽에서 형상으로, 혹은 형상으로 윤곽으로, 그림이 움직인다. 그렇다. 움직이고 있다. 분명 화폭에 잡혀 있는데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다. 설명을 거부하는 그림이 던지는 불안이다.
추상과는 다르다. 저자가 말했듯, 몬드리안의 추상은 디지털적 표상이다. 데시앙이라는 아파트 광고에서 보여준 피카소의 소가 추상화 되는 과정, 몬드리안의 나무가 추상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 추상의 표상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추상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결국 안정일 수밖에 없다. 그 반대편엔 추상표현주의가 있다. 잭슨 폴락의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그것은 설명의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 그림들은 개연성 없는 해프닝이다. 그야말로 액션의 흔적이다. 보는 사람은 그 액션의 결과를 볼 뿐이다. 당연히 불안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저 약간의 활기뿐.
저자와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베이컨의 그림은 형상화한다. 무엇의 형상화인가. 찰나의 형상화다. 원래 잡히지 말았어야 할 무엇, 포착되어서는 안 되는 무엇, 점에서 파생되어 막 선을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점의 생성 순간, 혹은 선에서 막 어떤 점으로 소멸되는 순간, 그래서 이 순간이 생성인지 용해인지 모르는, 그저 그전과, 혹은 앞으로 올 미래와는 다른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 그 단 한순간의 형상화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의 한 일면을, 아니 어쩌면 그 모두를 감지해 낼 수 있다. 차이의 순간에 대한 포착, 내재성과 내재성의 평면, 그 평면 위를 횡단하는 탈주의 시도,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분 없음과 동시 발생적 성격까지.
이런 생각 끝에 난 우연히 책 제목 하나가 생각났다.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라는 법정 스님의 법문집이다. 펼쳐보니 이런 문장이 나온다. “<화엄경> 법성계에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깨달음이고 진리의 세계입니다.”(P.154)
들뢰즈의 생각과 법정 스님의 저 문장은 스님의 다른 책을 부른다. 첫 번째 법문집인 <일기일회>다. 동명의 법문은 2008년 10월 19일에 열렸다. 그 마지막 문장을 가져온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일기일회(一期一會),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입니다. 이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P.54)
주체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다자성을 선택한다. 그 다자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 필수를 넘어 강요다. 다자가 된 주체는 사회에서 수많은 타자를 만나고 수많은 찰나를 겪는다. 그 찰나는 미처 감지되지 못한 채 과거가 된 뒤, 주체를 현재라는 순간에 머물게 하고 재빨리 미래로 보낸다. 우리는 그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찰나를 향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것이 주체에 대한 책무다. 더불어 그 찰나에 스친 타자에 대한 인식 또한 책무다. 그러나 대부분, 그 찰나를 보낸다. 우리가 찬 시계의 최소 단위인 초는 어쩌면 아주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불교적으로 보면 주체의 삶은 영겁이다. 전생과 이생, 그리고 윤회의 가능성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불교의 이 생의 순환 논리에 들뢰즈의 미분과 적분의 논리를 적용하면 우리의 지금 이 삶의, 이 순간은 그야말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주체는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장소와 시점으로부터 출발한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한 긴 선의 어느 지점, 한 점을 살고 있을 뿐이며 그 점의 온전한 수행은 어떤 선으로 이어질지 스스로 알 수 없다. 그저, 다만, 살고 살아낼 뿐이다. 바람이 있다면 그 선이 온전히 이어져서,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 선이 길게 이어지며 그 선 주변의 많은 다른 선을 이어가는 타자에게 덕과 선을 베풀어, 불교 용어를 빌리면 보시를 베풀어 자신의 선을 더 길게 이어가길 바라며 살아갈 뿐이다.
어떤 철학자든 바로 들이댈 수 없다. 딸이 입원해 있는 동안 딸에게 철학자와 그 책을 읽는 법에 대해, 농담처럼 얘기해 준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파티에 갔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 중 아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자기와 친한 지인을 소개해준다. 통성명을 하고 명함이 있다면 주거니 받거니 할 것이다. 만남은 거기서 끝난다. 어쩐지 호감이 간다. 친해지고 싶다. 그렇다고 그 한 번의 만남으로 다음날 바로 전화해서 “여~ 뭐해요. 차나 한잔해요.”할 수는 없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좀 더 익힌 뒤, 한참 뒤에야 독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도 말을 놓는다거나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거나 하는 일은 더 뒤에나 가능할 것이고, 술을 마시거나 목욕을 가는 것, 심지어 여행을 가는 건 훨씬 나중의 일일 것이다. 인문학, 혹은 철학을 읽어나가는 건 이런 과정과 비슷하다.
관심이 가는 학자나 분야가 있다고 무턱대고 들이대면 서로 입장 빡빡해진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바로 친숙해질 리 만무하다. 심지어 외국 사람이라고 생각해 봐라. 쓰는 언어도 다르다. 같은 사회과학대 안에서도 행정학과 법학과, 광고홍보학과가 쓰는 단어가 얼마나 다른가. 그러니 일단은 소개해줄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다.
확언하건대, 어느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칸트나 헤겔을 읽을 수 없다. 우선은 그 양반들을 소개해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중매쟁이 같은. 그러니 그런 위대한 철학자들 앞에서 자신의 무식함을 탓하지 마라. 애초에 그 양반들은 낯선 사람에 자기 곁을 쉽게 내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천천히, 주변부터 알아가야 한다.
물론, 소개해주는 사람도 알고 싶은 사람과의 친밀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소개해주는 책에도 난이도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대략적인 것을 알려주는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우선이다. 그 후 조금씩 앎의 농도와 깊이를 올려가는 것이다. 소개에 소개를 받고,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좀 알만하다 싶으면 그 “사람”과 단 둘이 만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둘만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니,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앎”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대충 이렇게 얘기를 다하고 나니 딸이 물었다. “그래서, 아빠하고 들뢰즈는 어느 정도 친한 사이야?”, “우리? 이제 뭐, 차 한 잔 마신 사이지. 뭐. 어디 가서 그 양반 안다고 말하기는 뭐 하고, 그냥 뭐 이름이랑 직업, 나이 정도 아는, 뭐 그 정도 수준 아닐까. 그런데 그 양반이 또, 자꾸 이 사람 저 사람, 계속 소개해줘서, 일단 명함을 받긴 받았는데, 알아가는 건 좀 천천히 하려고. 아직 그 양반도 알아가는 중인데.”하고 말하니 딸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