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동해선에서 읽은 책 132

by 최영훈

"올드함"의 조건

"오래 전"의 기준은 다르게 적용된다. 몇 년 전이어도 오래전 일수 있고 수십 년 전이어도 최근 일수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분야에 따라 책의 시간은, 때론 멀고 때론 가깝다. 요즘 SNS를 들락거리며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젊었던 시절에 읽었던, 심지어 청소년 시기에 읽었던 책들이 여전히 오늘의 젊은이들 손에 들려 있는 걸 볼 때다.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책은 옛것과 새것의 경계를 가볍게 무시하며 언제나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반면 몇 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조로(早老)한 책들도 있다. 사회적 현상과 이슈를 중심으로 쓴 에세이나 사회학, 인문학 책이 그렇다.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와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글을 잘 쓰는 학자라도, 작가라도 시대와 사회, 현상에 너무 다가서서 그것들의 한 편에 서서 들여다보고 분석한 책은 그 이슈와 현상이 사라지면, 몇 년 후 그 사건들이 큰 의미 없었음이 반성되면 그 글도 함께 사라진다. 마치 몇 년 전에 나온 TV 광고가 금세 “올드”해지는 것처럼.


그러나 문학은 예외적인 경우가 많이 있다. 역사적 사건을 다뤄도 지금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을 등장시켜 그 사건을 관통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관통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이 지금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그 과거의 문학의 울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심지어 더 크고 넓게 울린다. 한강의 작품들이 그러하고 기형도, 박노해의 시가, 우리가 학창 시절 배웠던 이육사, 윤동주의 시가 그러하다.


늙지 않는 이유

그렇다면 이런 책은 어떤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는 2006년에서 2009년 사이에 쓴 글을 모았다. 15년이나 지난 글들의 모음인 것이다. 게다가 그 글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은 그 시대에 나온 시인과 시이거나 그 훨씬 전에 등장한 시인의 시집과 새로 나온 시집들이다. 그가 다룬 소설, 이슈, 영화, 사회 현상은 딱 그 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전혀 “올드”하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글이 단정하다. 그렇다. 단정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이 겉으로 순해 보이는 사내의 글에선 강박이 느껴진다. 의미 전달을 위한 가장 완벽한 단어를 찾아내기 위한 강박, 문장의 운율을 고려한 단어와 조사의 배열, 그 운율을 가진 문장들의 전략적인 배열을 통한 리듬 있는 문단, 현악 4중 주의 악장처럼 기능하는 문단들, 그리하여 결국엔 읽기 그 자체의 즐거움을 주는 글.


다음으로는, 문학에 대한 애정이다. 그거야 문학평론가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 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 업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 의외로 당연하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문학평론가가 문학을 사랑하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시와 시인에 대해 쓴 글 안엔 시와 시인, 그 양자가 만들어낸 세계, 그 세계가 일으키는 작은 진동이 세상에 내놓는 다른 소리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는, 사건과 사회의 여전함이다. 그가 글에서 다룬 사건들은 그 시기에 있었던 이명박 정권의 천박한 행태, 용산 참사, 쌍용 자동차 사태, 그보다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등이다. 그 사건들은 그의 글에서 주인공으로 때론 조연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낯이 익었다. 그와 비슷한 행태와 사태와 사건들은 그 뒤로도 연이어졌고 현재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 개의 이유가, 그의 글이 가진 힘을 현재도 유효하게 한다. 그 힘과 믿음을 함께 느껴보자. 그가 전주로 내민 글인, ‘창비시선 통권 300호에 부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시는 어디를 향하는가」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 이 문장에, 신경민 앵커의 멘트를 소재로 한 글, 그 마지막 문장을 이어 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P.166)”


시로 시작하여 시로 끝나는

문학과 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시인에 대한 애정과 공존한다. 당연하다. 이 책의 1부는 이 시기, 그가 사랑한 열 명의 시인과 그 시집에 할애된다. 내가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각각 절반이다. 시인들이 그의 선배이고 친구이고 후배이기에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이 느껴진다. 심지어 진은영 시인에게 남긴 말은 잔소리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P.55)”


1부가 애정이 담긴 시인 열전이라면 2부는 일종의 시인 설명서다. 시인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시인의 신작 시집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시인과 시를 읽어내는 그만의 방법을 소개한다. 그러나 강요는 하지 않는다. 자신의 방법을 그저 소개할 뿐이다. 그렇게 담담한 소개여서 오히려 거부감이 없다. 게다가 그 시기에 등단했거나 한두 권의 시집을 낸 당대의 시인들이 대부분이어서 그 소개가 반갑기까지 하다. 그 시대의 대표 시인을 알고 싶다면 2부의 설명서를 참조하라.


3부와 4부는 짧은 글의 연속이다. 각각『대학신문(3부)』과『시사IN(4부)』에 실린 글이다. 전자의 글들은 시사적인 칼럼에 가깝고 후자의 글들은 신간 소개에 가깝다. 그러나 제한된 지면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단어와 문단의 효율적 사용, 짧은 글 안에서 생각을 전개시켜 종국에는 결론에 다다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 보인다. 그야말로 짧은 글쓰기의 교과서라 해도 무방하다. 개인적으로 4부에 실린 소설 중 좋아하는 작가의 것이 있어 더 공감하며 읽었다.


다시 시와 시인을 얘기하는 6부 앞에 놓인 5부가 독특하다. 난 이 5부가 가장 궁금했다. 문학평론가, 그것도 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나와 동년배인 이는 영화를 어떻게 볼지 궁금했다. 네 편의 영화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박찬욱의 <박쥐>, <위대한 개츠비>, 이창동의 <시>다. 당연하게도 이 중 세 편은 원작 소설이 있고 <박쥐>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비교되어 해석된다. 이창동의 <시>또한 시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의 전작이자 원작 소설이 있는 <밀양>과의 비교이기에, 결국엔 영상에 관한 글이 아닌 이야기에 관한 글이다.


공감하며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레이번드 카버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코맥 맥카시를 그도 좋아하고 팬이라는 점에서, 그가 아파하고 분노했던 사건과 사태에 나 역시 그러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천박함에 나 역시 치를 떨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는 문학에 희망을 걸고 있다. 당연하다. 뭐든 가치 평가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시대에 사람다움을 일깨워줄 수 있는 그 “무엇”에 희망을 거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누구는 사랑에, 누구는 사람에, 누구는 종교에 희망을 걸듯 그는 문학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수경의 시에 관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와닿는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P.98)”


딸에게 내민 교과서

다른 글에 썼듯이 딸의 투병을 지켜보면서 덧없음과 부질없음의 감정과 마주해야만 했다. 완치와 함께 봄을 맞이했고 꽃을 봤다. 딸의 혈색이 돌아오는 걸 봤고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걸 봤다. 여전히 투병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 빠진 겉눈썹과 아랫눈썹은 아직 나지 않았고 민머리도 여전하다. 덕분에 아침마다, 딸이 잠을 깨어 나와 거실 의자에 앉으면, 그 까슬까슬한 머리통에 뽀뽀를 해줄 수 있다.


등교를 시작한 딸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저녁에 딸이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할 때, 난 그 앞과 곁에서 책을 읽는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그러다 국어 선생님 얘기가 나왔다. 수행평가로 에세이를 써냈는데, 그중 몇 명의 것이 반려 됐다고 했다. 그 이유 때문에 딸은 그 선생님을 꼰대 같다고 한 것이다.


에세이를 쓰기 전, 아이들은 개요를 제출했다. 그 개요에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문단의 사전 계획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문단의 사전 계획이라 함은 몇 문단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사전 구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지키지 않은 아이들 것은 고쳐오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4 문단을 쓰기로 했는데 문단을 세 개 밖에 쓰지 않았거나, 첫 문단은 문장이 하나인데 두 번째 문단은 문장이 네 개여서 그 균형이 깨진 경우가 그렇다.


그런 딸에게, 선생님이 옳다고 말해준 뒤 그 이유를 붙였다. 글은 음악과 같아서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에 리듬과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빠도 칼럼을 쓸 땐 그리 쓰려고 노력한다고. 이후, 마침 읽고 있던 신형철의 책, 3부를 보여주며 함께 문단을 샜다. 몇 개의 글에 문단의 개수가 동일하다. 혹시나 해서 문단의 줄을 샜다. 일곱, 일곱, 일곱, 일곱....... 심지어 마지막 문장이 절반 정도인 것도 같다. 딸이 “오~소름.”이라고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지른 뒤 크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의 책은 이렇게 중학생의 글쓰기의 교과서로서일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에서의 그것으로 사용되기에도 손색이 없다. 사전이나 총람으로 쓰기에도 무리 없다. 글쓰기의 교과서, 그 시대의 시와 시집의 총람으로는 물론이고, 그 시대의 언어와 문장과 사건의 사전이자 총람으로, 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여 시대의 아픔을 반복하는가를 반성하기 위한 교과서로서도.


사족 -

단숨에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의 글이 잠시 멈춰 생각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고 하나의 책에 많은 글을 담기 위해 책의 두께가 무려 4백 페이지가 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이유 다, 독자에게 행복을 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