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33
“나의 관점에서 대상은 전형적인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나는 이러한 관점을 택했다. 왜냐하면 나는 주체의 문제와 결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상의 문제는 대상의 해결책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나의 사고방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체 속에서 만들어진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이 서로에게 말했던 것, 즉 대상들이 만들어 냈던 기호 체계와 통사론이다.”, P.13
이제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데 학창 시절의 기억 때문에 무심히 끌리는 학자가 있다. 보드리야르도 그중 한 명이다. 보드리야르는 상징과 기호의 맥락에서, 소비사회와 광고 분석의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와 함께 학창 시절에 많이 읽었던 학자였다. 그 후 두 사람의 책은 눈에 보이면 저항 없이 집어 들게 됐다.
두 사람은 당연해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그 무엇을 드러나게 한다. 기호학을 중심으로, 상징 교환의 논리로 자본주의와 광고와 소비 행태와 더 나아가 연애와 사랑과 정치를 분석한다. 특히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와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는 광고와 소비 사회 분석에 기호학과 상징분석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된 책이다.
이 책은 <소비의 사회>와 <시뮬라시옹>, 그리고 <사물의 체계>에 담겨 있는 보드리야르의 생각과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단편들이다. 아니, 파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도. 백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 안엔 암호, 대상, 가치, 상징적 교환, 유혹, 외설스러운 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잡담하듯 담겨 있다. 이보다 조금 더 긴 잡담으로는 <토털 스크린>이 있으나, 후자엔 당시의 사회적 사건과 현실이 그 뼈대로 자리하고 있는 반면, 이 책 <암호>는 생각을 툭툭 던져 놓은 느낌이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유혹의 세계는 생산의 세계에 철저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P.29
“사유는 완전히 모든 것을 순화시키고 죽음과 부정성을 전멸시키는 세계 속에서 파국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며, 그 자체가 파국과 도발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 PP.92~93
서평이 산으로 - 이런 책의 서평이 산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로 가겠나 싶긴 하지만 - 가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끌고 가자면, 이런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몇 마디 얹어 보려 한다.
이유 같은 건 없다. 보드리야르나 부르디외나 푸코나 라캉이나 들뢰즈를 읽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나. 서동욱이나 신형철이나 김민호나 백상현을 읽는 데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사전을 보면, ‘어떠한 결론이나 결과에 이른 까닭이나 근거’를 말한다. 구실이나 변명이라는 뜻도 있다. 철학적으로는 인과율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어떤 책을 읽는 데 이유를 찾는 건 돈을 쓸 때마다 투자 대비 수익률, 즉 ROI를 계산하며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물론 실용적인 책이나 요리책을 사는 사람은 그런 걸 염두에 두겠지만, 보드리야르에게 그게 가능 키나 한가. 내가 쓰는 얼마 안 되는 돈 중 그나마 이 ROI의 맥락에서 그 이유를 확보할 수 있는 씀씀이는 수영 밖에 없을 것이다. 독서는 그야말로 그냥 무용(無用)한 행위, 탈생산적인 행위인 것이다.
물론 칼럼을 쓸 때 가끔 읽은 책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지만 이 정도의 쓸모는 맥주를 좋아하는 내게 괜찮은 맥주를 추천해 달라고 할 때 몇 개 추천해 주고 술을 얻어 마시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쓸모다. 그야말로 ~한 김에 ~한 정도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드리야르의 저 두 문장, 유혹과 사유에 할애된 문장은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변용되기에 충분하다. 아무런 생산성이 보이지 않는 책 - 보드리야르와 같은 저자의 - 에 ‘유혹’ 당해 사서 그 책을 읽어가며 이 세상의 질서, 그 안온함 뒤에 숨겨진 내면의 균열을 탐색하는 행위는 ‘파국’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도발’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을 그렇지 않게 보는 반동적 시선을 가진 존재의 탄생, 혹은 그 잉태의 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의 유혹이 후손의 탄생을 염두에 둔 의도적 행위가 아니듯 독서 또한 그렇게 순전한 쾌락의 영역에서 행해져도 무방한 행위다. 그러니 읽지도 않은 책을 사서 쌓아두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마시라. 누군가 말했듯이, 읽기 위해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놓은 책 중에서 골라 읽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