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음과 부질없음, 그리고 두 번의 모욕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57

by 최영훈

병원에서 겨울을 보냈다. 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 겨울을 보내는 동안 삶의 가치관이 흔들렸다. 자신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원래 좋아하던 부분은 싫어하게 됐고 싫어하던 부분은 더 싫어하게 됐다.


안 그래도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로부터 떨어져 자신을 보는 법을 익히게 된다. 덕분에 도취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는다. 그저 살아가고 살아낸다. 그래야 정상이다. 당연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것과 닮은 혐오와 연민을 동시에 갖는다. 안쓰러우면서도 혐오스럽다. 우린 다 그렇게 버둥대며 산다. 이 편과 저 편을 오가며 갈팡질팡하며 산다. 서로에게 있는 그 삶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알기에 안쓰러움도, 혐오도 내색하지 않는다. 다들 우왕좌왕하며 살고 있으니.


두 번의 모욕

모욕은 답이 있는 사람만 줄 수 있다. 아니, 정정한다. 모든 것에 정확한 답이 있다고 믿는 사람만 타자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다. 아니, 다시 정정한다. 정답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고, 어느 위치가 되면 그 위치가 답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 올 초,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한 번은 감독과 입찰 서류를 시청의 관련 부서에 접수할 때였다. 담당 계장과 주무관은 감독이 준비한 서류를 꼼꼼히 살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접수한 업체였다. 서류를 내고 경쟁 PT도 해야 했다. 당연히 감독도 나도 나름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류를 거의 다 살필 때쯤, 계장이 감독을 올려보며 물었다.


“준비 잘 되고 있어요?”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계장이 툭 말을 던졌다.

“열심히는 누구나 하죠.”, 그 순간, 난 그 사람의 목을 조를 뻔했다.


이 상황을 그대로 아내와 딸에게 말해줬다. 둘 다 불 같이 화를 냈다. 그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이 정답인지 대기업에 다니는 아내도, 중학생인 딸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나 “네, 끝까지 잘 준비해 주세요.” 정도다. 열심히는 누구나 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기를 꺾고 의지를 꺾는 말이다. 그 말을 한 사람도 분명 그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건이다. 시의 한 부서에서 의뢰한 영상을 제작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담당자가 감독에게 전화를 해, 시의 큰 축제를 기획하는 감독과 자리를 마련했으니 같이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그 이유를 나름 추측했다. 축제 홍보 영상을 새로 만들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우리가 나름 내린 추론이었다. 시청 건너편 건물에 축제기획본부가 있었다.


마주 앉았다. 자리의 이유는 간단했다. 그 사람이 시장과 제일 가깝고 아이디어가 많으니 영상과 카피의 팁을 얻어가라는 것이었다. 홍보실에서 나온 두 명의 직원과 우리에게 일을 준 부서의 두 직원, 그리고 그 감독과 우리는 회의 같지 않은 회의를 했다.


일이 거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참을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삼일 후 카피와 콘티를 만들어줘서 건넸다. 며칠 후 그쪽에서 보내온 파일 속 카피를 보니 자기들 입맛대로 고쳐 놨다. 운율은 깨졌고 리듬은 없어졌다. 감독은 그 카피 그대로 영상을 만들고 있다며 내게 통보했다.


약도 없는 지역의 고질병

이런 사태가 갑과 을의 관계에서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 보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이 아니어서 더 큰 문제라 볼 수 있다. 이 지역엔 대학도 몇 개 없지만, 그나마 있는 대학에도 광고/홍보, 그리고 영상 관련 학과가 없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의 전문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야말로 조선업, 자동차, 석유화학 같은 지역을 먹여 살리는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과 그 분야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 부재하여 생긴 일인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이 지난 십여 년 간 워낙 비일비재해서 새삼 놀랍지도 않다. 다만 2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우리한테도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데, 훨씬 젊은 감독이나 대표한테는 어떤 태도를 보일지, 난 그게 걱정이 될 뿐이다. 게다가 앞으로도 새로운 대학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고, 관련 학과 또한 생길 가능성이 적다 보니 이 분야의 전문성과 학문적 성격에 대한 존중 또한 발생할 리 없다고 보면, 이 사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될 것이라는 것도 걱정이다.


하찮은 것들

그러나 분노는 그때뿐이었다. 딸의 투병을 함께하면서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쓰고 애써 쟁취한 것들이 얼마나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지, 딸과 병동의 수많은 환자들로부터 느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다른 글에도 썼듯이, 덧없음과 부질없음을 불렀다. 그 감정으로 인해 어지간한 일은 하찮게 느껴졌다. 딸이 완치된 뒤에도 저 두 감정, 덧없음과 부질없음을 떨쳐내기 위해, 두 감정에 그 기원을 둔 하찮다는 감정을 버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고백하건대 난 여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어느 책 제목을 빌려 와 말하면, 아직도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


자기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왔는지, 종양이 크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경험의 한계와 앎의 지경의 한계를 미처 헤아려보지 못하고 그 한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넓고 높은 곳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자신을 바로보고 삶과 생명과 우주의 신비 앞에서, 동네 도서관에 있는 책조차 다 읽어보지 못한 자신의 무지함과 게으름의 자각 속에서 한 없이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이 반대다. 평생 자신이 쌓아 온 것을 하나의 성처럼, 탑처럼 여긴다. 그저 자신의 몸 하나를 겨우 구겨 넣을 수 있는 좁디좁은 곳이건만 그곳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 질병 앞에서 자신이 쌓아 올린 그것이, 두 손에 움켜쥔 그것이 무너지고 날아갈 수 있음을, 죽음과 질병이 찾아오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이 대부분이다.


그럴 수 있어서 그래도 된다는 사람 앞에서 논리는 무력하다. 설득의 시도는 에너지 낭비다. 그렇게 만들면 온 시민이 부끄러워할 뭔가가, 그야말로 험한 것이 세상에 나와 버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감독도, 나도 먹고살기 위해 놔둔다. 나는 더 그렇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자기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텐데 그 귀에 무슨 말을 하겠나. 덕분에 이전보다 더 홀가분해졌다.


요즘엔 딸을 오랫동안 보고 있는 것이 삶의 낙이다. 아직 머리카락이 나지 않아 민머리인 탓에 더 또렷이 보이는 딸의 이목구비를 한참 뜯어보는 것이 사는 낙이다. 아기 때부터 제 아비가 해 왔던 짓이라 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아빠의 시선을 그냥 두고 자기는 할 거 한다.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연습을 하고 책을 보고 간식을 먹고 밥을 먹는다. 그런 딸을 보는 것이 삶의 낙이다. 뭐가 더 필요하겠나. 건강한 딸을 보는 것이 삶의 낙이다. 다른 것은 그저 부수적인 것들이다. 지엽적인 것들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잘 돼도 그만 못 돼도 그만인 것들이다. 내 눈앞에 딸이 건강하게 있는 걸로, 충분히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