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던진 딜레마

카피라이터의 그늘

by 최영훈

AI에 반한 사람들

몇 년 전, 감독의 선배는 홍보 영상 시나리오를 챗GPT에게 맡겼다. 그 선배는 한 때 서울에서 각 분야의 재주를 가진 직원들을 고용하여 제작사를 꾸려갔던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와 혼자서 같은 일을 하는 데, 일의 크기와 성격, 상황에 따라 촬영이나 편집, 조명, 글과 기획을 주변 전문가들에게 맡겨왔다. 그러다 AI 툴을 알게 됐고 그 툴을 이용해 기획이며 시나리오, 심지어 간단한 카피까지 쓰게 된 것이다.


이후 내 동료 감독도 AI 툴에 빠져 그 기능의 시연을 내게 몇 번 보여줬다. 프롬프트만 섬세하게 입력하면 영상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최근 유행하는 것처럼 영상을 특정한 톤 - 지브리 톤 같은 - 으로 바꿔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챗 GPT처럼 텍스트 정보를 넣으면 그걸 요약해 주거나 그럴듯한 기획서, 혹은 시나리오로 바꿔주는 것도 보여줬다. 이제 당신도 꼭 써야 한다는 주장을 마지막에 남기는 걸 언제나 잊지 않으면서.

물론 나도 써 봤다. 예를 들어 홍보 영상 속에 직원이나 소비자의 인터뷰가 들어가는 경우, 그 사람의 정보와 경험을 입력한 뒤 10초 분량의 감사 인사를 만들어달라고 해봤다. 제법 그럴듯한 멘트가 나온다. 당연히 러닝타임도 칼 같이 지킨다. 그런데 뻔하다. 멘트의 정서 - 예를 들어 감성적, 이성적 - 를 설정하면 각기 다른 형태의 멘트가 나오는 데, 이 역시 전형적이다. 엄밀히 말하면 관련 분야의 신입 직원이나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교 1, 2학년 수준의 멘트가 산출된다.


시나리오 전체를 맡겨도 그렇다. 성우와 영상의 전체 분위기를 명확하게 설정해 주면 그에 맞게 내레이션이 형성된다. 괜찮다. 나쁘지 않다. 그러나 뻔하다. 가장 먼저 쓸법한 문장이다. 가장 먼저 쓴 뒤 ‘너무 뻔한데.’라고 생각한 뒤 다른 단어, 다른 표현을 찾아 긴 고민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는 표현이다. 고객이 보면 ‘이 정도면 나도 쓰겠는데.’하고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다. 전문가에게 맡겼는데 누구나 쓸 정도의 산출물을 들고 오면 돈을 지불한 이유가 없다. ‘이 정도면 차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몇 년 전에, 울산 콘텐츠 코리아 랩의 프로그램 운영사 선정 심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심사위원 중엔 나 같은 이도 있었고 대학 교수, 방송국 PD, 웹툰 작가도 있었다. 심사를 진행되면서 심사위원들의 질문이 하나로 모아졌다. 모든 발표 자료들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그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주최 측에서 자료에 따라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그 자료와 프로그램 기획은 자신들이 과거에 했던 유사한 - 엄밀히 말하면 지역과 사람만 다를 뿐, 내용 구성은 똑같다. - 프로그램을, 거의 답습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의 특성과 정성에 따른, 공간과 시기의 특성에 따른 차별점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건 그나마 나은 상황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AI의 남용 이후에서야.


학습의 본질

학습은 과거의 것을 익히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것은 배울 수 없다. 내일 탄생할 지식은 오늘, 학습이 불가능하다. 당연하다. 과거의 것이기에 이미 그것을 익혀 아는 가르쳐줄 사람이나 배워야 할 내용을 모아놓은 교재가 있어야 한다. 이 사람과 그 뭔가가 함께 있는 곳이 학교와 학원이다. 장소와 내용의 공존이다. 더불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 시간은 사람의 지능과 성실함에 따라 다르기에 배움은 한 사람의 인성과 삶의 태도까지 알 수 있다. 학습(學習)의 한자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집이나 서당에서 배운다는 의미가 배울 학자에, 새가 태양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 만큼의 날갯짓을 배우는, 한 개체의 성장의 시간과 날개의 근육이 생길 때까지의 퍼덕거리는 시간의 필요가 익힐 습자에 담겨 있다.


AI의 편리함은 이것의 삭제, 혹은 줄임에 있다.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도 된다. 공간이 없어도 된다. 좋은 질문과 내용의 판별 능력만 있으면 된다. 여기서 이상한 도돌이표가 발생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알고 있는 사람만이 모르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다 모르는 사람은 콕 집어 질문할 수 없다. 다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선문답에 가깝다. 내용의 판별 또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선험적인 맞고 틀림의 기준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의 형성을 위해서는 선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선험은 당연하게도 학습이다. 학습되어 있지 않으면 AI를 통해 공부를 할 수 없다. 이것이 요즘 각급학교와 필자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관련 전공 분야가 갖고 있는 딜레마다.


어떤 도구가 사람에게 유용하기 위해선 그 사람에게 선제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단순해 보이는 망치질조차, 삽질과 낫질조차 경험이 없으면 서툴고 다친다. 기계가 복잡할수록, 얻어야 될 답이 심오할수록 관련 지식은 더 깊어지고 기술은 숙련되어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AI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수준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배움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AI는 고릴라에게 던져진 타자기고,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사람 앞에 놓인 피아노다. 결국 배움의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 직장과 학교에서 AI를 남용하면 차이 없는 결과가 쏟아진다. 오늘날, 대학의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이와 같다. 그렇게 졸업한 이들은 대량 생산된 제품에 불과하다. 그 양산된 인재들을 줄이기 위해 교수들은 과제의 내용이나 난이도를 결정하기에 앞서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여 한 줄이라도 자기 힘으로 쓰게 할 방법을 찾고 있다.


퇴화의 경고

들뢰즈ㆍ과타리 연구의 권위자이자 AI 기술을 인문학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김재인 교수는 요즘 다양한 곳에서 AI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강연과 강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이 함축되어 있는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김재인 교수는 6월 25일, 경향 포럼에서 <기계에 격노해야 한다.>라는 주제로 강연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다”는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대사를 인용하며 강연을 시작한 뒤 강연을 이어나갔다.


“최근 사람들은 글을 쓰고 자료를 분석하는 등 의사결정이 필요한 일도 인공지능에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하며 “본인의 역량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인공지능에 의탁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인공지능에 의사 결정을 맡기는 일을 “충분한 사고 훈련을 거치지 않은 초중고 학생에게 계산기부터 쥐여 주는 일”에 비유했다. 수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거치지 않은 학생이 곧바로 계산기를 사용하면 다른 고도의 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지 않고 인공지능에 의사결정을 맡기면 지능적으로 퇴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 퇴화의 결과 “평균 지능의 절댓값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인간들의 지능이 퇴화하는 연쇄 작용이 일어날 것이고 이러한 지능의 퇴화는 불과 몇 세대만 거치면 충분히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 퇴화가 앞서 도돌이표와 같은 딜레마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인공지능은 내일 도래할 지식을 학습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딘가에서 아무도 몰랐던 새로운 별 하나를 찾아낸 천문학자가 준비하고 있는 발표 자료를 미리 학습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세상에 내놓은 것을 부지런히 학습하여 구조화하고 체계화할 뿐, 없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에게 미래와 가능성은 학습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능력이 높아져야 하고 지식이 꾸준하게 쏟아져야 한다. 발명과 발명은 계속되어야 하고 철학의 새로운 해석과 문명의 새로운 조명도 이뤄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의 관건은 이 모든 걸 해야만 하는 학자, 지식인의 지속적인 배출이다. 김재인 교수의 말처럼 인류의 지능이 퇴화한다면 우리는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마치 <월 E>의 인간들처럼 말이다.


프롬과 월 E의 경고

에리히 프롬은 1969년에 내놓은 <희망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이미 인간의 수동적 존재로의 퇴화를 걱정했었다. 김재인 교수의 걱정과 맞닿는 지점이고 <월 E>에 나오는 인간들은 그 퇴화의 메타포다. 더 나아가 에리히 프롬이 말한 수동적 희망에 사로잡혀 그저 막연히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지금 아무것도 안 하며 기계 문명에 의존해 사는 존재에 대한 은유는 복제인간을 다룬 영화 <아일랜드>에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그 안전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사람은 생각하고 의심하는 사람이었고 <월 E>에서 인공지능이 모든 걸 관장하는 대형 우주선의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는 타자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잔존해 있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퇴화의 마지노선에서 저항하는 존재였다.


학생은 실수와 오답을 통해 발전한다. 질문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문제를 내는 이와 질문에 대답을 하는 이를 선생이라 한다. 그 선생이 인생에 깊은 가르침을 남기면 스승이라 부른다. 우리가 특정 대학의 특정 교수에게 배우는 건 그 학교와 그 교수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학풍(學風)과 학파라고 한다. 신입생의 경우엔 아직 학파(學派)의 물결에 깊이 들어가기 전 관련 된 지식을 두루 배우는 시간을 갖는데, 이때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하게 되면 학풍이라는 멀리 가는 큰 바람에 올라 탈 힘을 기를 수도 없고 학파라는 깊은 물결에 지성을 내어 맡길 수도 없다.


얕은 물에서 발목만 담그는 사람은 물이 두려운 사람이거나 아이뿐이다. 수영을 하고 싶다면 온몸을 물에 맡겨야 하듯 지식의 바다로 들어가고 싶다면 일단은 스스로 해변에 가야만 한다. “나는 진리라는 거대한 바다 앞에 선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아이에 불과하다."라고 했던 뉴턴의 겸허함을 기억하자. 뉴턴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그 바다에도 도착하지 못한 존재 아닌가. 부지런하고 꾸준해야만 하는 이유다. 사람답게 생각하기 위해.


매거진의 이름을 <카피라이터의 그늘>로 바꿔, 요즘 세상을 보며 드는 생각을 옮겨보려 한다. 칼럼의 아주 긴 초안이거나 문단의 모음일 수도 있기에 약간은 산만하고 어수선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