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의 그늘
해고됐다. 냉정하게 표현하면 그렇다. 세련되게 표현하면 구조조정, 혹은 권고사직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오랜 세월 이어온 인연이기에 무 자르듯 관계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인연, 그리고 관계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일의 특수성과 함께, 더 나아가 우리가 함께 넘어온 시간에 대해서도.
앞서 다른 글에서 썼듯이 2002년에 부산에 와 1년 간 좌충우돌하다가 2003년에 카피라이터의 세계에 들어섰다. 그 후 2005년, 한 때 같은 회사에 있었던 박 00 감독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A라는 회사로 이직했고 거기서 먼저 일하고 있던 서 00 감독을 만났다. 이후 박 감독과 서 감독이 의기투합하여 울산에 회사를 차리기로 했고 나를 기획 겸 카피라이터로 스카우트했다. 이듬해, 난 결혼했고 회사는 망했으며 회사명은 서 감독이 인수받아 사업을 이어갔다. 난 이후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그동안 난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었다.
번아웃이 찾아왔다. 부산에서 서울로, 일주일에 두세 번 등교를 하면서, 또 많은 공부량에 짓눌리면서 심신의 피로가 몰려왔다. 아내는 나름대로 바빴고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막막함과 피곤함을 혼자 끌어안고 버텼다. 그러다 2012년, 딸이 태어났고 난 육아휴직이 끝난 아내를 대신해 육아를 맡았다. 살아야 할 이유와 쓸모를 겨우 알았다. 딸이 없었으면 난 죽었을 것이다. 딸이 크는 동안, 서 감독과 종종 일을 했다.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 무렵, 서감독이 찾아왔다. 관계의 성격을 바꾸자고 했다. 나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싶다고 했다. 감독이 제시한 조건은 이랬다.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해라. 나머지 일은 집에서 해라. 대신 급여는 많이 못 주지만 큰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인센티브로 더 얹어 주겠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딸에겐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했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건 아이를 종일 방치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많은 부모들이 생계를 위해 부득의 하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근에 조부모가 산다면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방과 후 학교나 돌봄 교실에 맡길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엔 학교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서너 시까지였고 그 이후엔 학원을 돌려야 했다. 아내는 학원에 보내는 걸 꺼려했고 딸도 아빠의 손길을 원했다. 우리 가족의 이런 욕구와 서 감독의 욕구가 맞아떨어졌다.
운이 들어왔다. 마침 전 해 여름, 그러니까 2018년 여름에 울산 시장으로 진보 정당의 정치인이 당선됐다. 부산시장과 경남 도지사까지, 그야말로 지방선거를 민주당이 압승했던 시기였다. 이후, 울산 시정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남성적이고 권위적이던 메시지 전략의 수정이 가해졌다. 이다음 해, 그러니까 내가 서 감독과 일하기로 한 그 첫 해, 우리는 시청 홍보실에 부름을 받아 들어갔고 감성적이면서도 선 굵은 영상 제작을 의뢰받아 진행했다. 또, 당시 얼마 후 태화강 국가정원 홍보 영상도 맡으면서 시청 안팎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4,5년을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운이 다했다. 2023년, 여름, 보수 정당의 정치인이 당선됐다. 당연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물론 그 뒤로도 시의 일을 했다. 시의회 일도 했고 트램 유치를 위한 시민 홍보 영상 시리즈를 제작했고 시정 영상도 제작했다. 경주에서도 연락이 와 그쪽일도 했고 조선 및 해양 관련 일도 했다. 그러다 2024년부터 일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원래 영업을 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사람을 만나러 다니지 않는 서 감독은 들어오는 일은 했으나 일을 만들지는 못했다. 울산 토박이인 그에게 이미 울산 사회 곳곳에 중진으로 자리 잡은 선후배들을 만나고 골프라도 함께 치고 다니라고 조언을 했지만 그의 성격상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운이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해가 바뀌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독특한 꿈을 꿨었다. 누가 들어도 길몽인 꿈들을, 늘 정초에 꿔서 감독에게 얘기해 줬었다. 미신 같겠지만 꿈 얘기를 한 뒤 며칠 후면 꼭 큰일이 들어왔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어쩌면 내 신경이 온통 딸에게 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운이 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떠날 때를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희망의 징조가 없었다. 감독은 심리적으로 무너졌고 그 무너지는 소리가 내게도 들렸다. 침묵과 무례와 한숨을 통해. 결국, 2025년, 7월에 관계가 정리됐다. 두 번의 지방 선거를 축으로 우리의 운은 들어왔다 나갔다.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나와 감독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일을 진행했다. 또, 필요에 따라 다양한 업체들의 도움을 받았다. 현재는 다들 어려운지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다들 살아있기는 한건 지, 먹고는 사는지 안부를 묻기도 민망할 정도다. 아직 함께 일했던 이들의 부고(訃告)를 받지 못했으니 나름 갖은 수를 동원하여 버티고 있을 테다. 감독과 나처럼.
그가 버티길 바란다. 그가 내린 결정은 궁여지책이었다. 그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숨 쉴 구멍은 되어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불황의 심해에서 가장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가라앉아 있다. 그런 그에 비하면 내 삶은 사치스럽고 호화스럽기까지 하다.
점심을 먹고 온 후,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난 그 대화를 끝내고 일찍 가겠다고 하고 나왔다. 어색하게 앉아 있느니 딸을 데리러 가는 게 정신건강에 좋으리라 판단해서다. 다시, 아주 오랜만에 소속이 없어진 셈이다. 이사를 나간 빈집이 된 듯도 하고 목적지가 없이 고속도로에 오른 드라이버가 된 듯도 하다. 다시 소속을 찾을지, 혼자 움직일지는 딸과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서 결정할 것 같다. 물론 그전에 어떤 일이 생긴다면 또 모르지만 이 또한 사람의 일이라.
돌아오는 동해선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작년에 후배의 조언을 듣고 고수와 전문가를 찾는 사이트에 내 프로필을 등록했었는데, 그 이후로 의외로 많은 이들이 신청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답할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잘하고 좋아하는 것 중에서 오랫동안 안 하던 것이 가르치는 일, 강의였다. AI로 논문까지 쓰는 요즘, 역설적이게도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 돈을 내면서까지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대가 왔다. 한 이십 년 전, 글쓰기를 가르치는 게 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명함을 파서 고급 아파트 단지를 돌며 우편함에 넣은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때는 단 하나의 연락도 오지 않았었다. 자기 홍보의 도구가 전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홍보의 도구가 진화했고 시대의 요구가 거세졌다. 기회인 건가. 그럼, 우선 갖고 있던 강의안, 강좌 계획안, 강연 원고 등을 다시 들여다보고 정리를 좀 해놔야 하나. 아내는 필명을 써보라고 권했다. 명함도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고, 후에는 딸과 상의해서 회사 이름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지, 동해선의 리듬에 흔들리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좀 있으면 딸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얼마 전 아내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감독과의 결별이 예감된다고 넌지시 말을 건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올 초 점을 보고 왔는데, 나한테 오랜 인연이 다시 연락이 와 하반기에 큰돈을 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웃으며 그랬다. "야, 최근의 인연도 없는데 오래된 인연은 무슨.......", 그리고 잠시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2003년부터, 지금까지 카피라이터 일을 20년 넘게 했다. 그 시간 동안 섣부른 선택, 날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한 끝에 내린 결정들이 줄을 이었다. 온라인 언론사를 운영하는 대학원 동기의 권유로 칼럼을 쓴 지도 6년 정도 됐고, 브런치에 글을 올린 지도 그 정도 됐다. 덕분에 다양한 성격을 글을 쓸 수 있었고 딸의 초등학교 1학년부터 현재까지의 기억과 추억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다.
동해선이 송정을 지나 신해운대역으로 접어들 즈음, 몇 시간은 물론이고 16주 강의를 할 만한 이런저런 글쓰기 노하우와 아이디어 발상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한 때는 대학에서 몇 초 만에 수강신청이 끝난다며 학생들에게 완판남으로 불렸던 사람 아니었던가. 덕분에 돌아보면, 내 삼십 대는 괜찮았다. 다 학생들 덕분이다.
딸을 낳고 키우면서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경험이었다. 어쩌면 다시,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지도. 하여, 혹시라도 필요하신 분은 연락 주시라. 예전에 했던 강연 제목처럼, 100자부터 100장까지 쓸 수 있는 힘과 노하우가 궁금하신 분이나 단체나 조직이나.
일단 더위는 보내고 나서 움직일까 생각한다. 딸의 여름 방학이 끝난 다음에나 움직여 볼까 생각한다. 그러나 더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하고 부르짖는 이가 있다면, 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