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한 시간 뒤에 남은 것들

카피라이터의 그늘 61

by 최영훈

딸과 함께하는 짧은 휴가

정리의 시간을 갖고 있다. 마침 딸도 곁에 있다. 목요일엔 원래 항암 치료 이후, 그러니까 투병 이후 회복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비타민 주사가 예약되어 있었으나, 취소하고 그냥 집에서 쉬었다. 목요일 저녁엔 눈이 약간 이상해 보였는데, 금요일 아침에 보니 다래끼가 났다. 투병 이후, 열심히 공부하며 달려온 딸에게 잠깐 쉼표를 선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이틀 연속 집에서 공부를 했다. 금요일엔, 동네 안과가 문을 열자마자 데리고 갔다. 이후, 집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오전을 보냈고, 내가 수영을 갔다 오는 길에, 지역의 유명 빵집에서 사다 준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덕분에 나도 딸을 돌봐준다는 핑계로, 실업자 주제에 제법 마음 편히 쉬었다.


감독과 함께 한 시간들을 돌이켜봤다.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서운함도 있고 아쉬움도 있지만 화는 나지 않는다. 그의 운과 우리의 인연이 다했을 뿐이다. 그 징조가 당도한 이후로도 그는 제법 오래 견뎠고 해야 될 말을 참았다. 난 미처 뱉어내지 못하는 말의 내용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했다. 말은 그가 뱉어야 했고 책임 또한 그의 몫이었다.


함께 일하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광고와 홍보 영상에 작품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긴 시간 일한 이들이 모여 땀을 흘려가면서 애를 써서 만든 결과물을 “작품”이라 부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은 없다. 그 작품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 나름 공을 들여 만들 것들을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싶다. 자랑이라기보다는 함께 일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담은 헌사라 보면 되겠다. 여기 딱 세 작품만 소개하련다.


울산 대왕암

이 영상은 울산의 주요 관광지를 소개하는 일련의 시리즈 중 첫 작품이었다. 감독과 나는 답사를 갔다. 대왕암을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넓은 솔밭과 그 사이로 난 고요한 진입로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왕암은 그 길 끝에 드넓은 바다를 배경 삼아 우뚝 솟아 있었다. 보고 돌아오는 길, 감독에게 말했다. 이 광고, 게임 광고처럼 만듭시다.


당시의 게임 광고들은 중세의 웅장함을 지향하고 있었다. <킹 아서>와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비장미 있는 카피와 영상이 차고 넘쳤다. 이 감성을 대왕암을 향해 걸어가면서 느꼈다. 마침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대왕암에 대한 울산 동구 주민과 향토사학자들의 애정과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렇다면 광고 또한 그들의 자부심에 호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피는 퇴근길,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초안을 썼다. 감독은 해무를 촬영하기 위해 근처에 숙소를 잡고 며칠간 새벽마다 대왕암을 찾았다. 놀랍게도 이 영상엔 CG가 사용되지 않았다. 약간의 보정만 있을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20_11LCpws


태화강국가정원- 겨울 편

론칭 광고부터 이후 사계절 시리즈 광고까지 진행했다. 모든 결과물이 다 맘에 들지만, 이상하게 난 겨울 편에 끌린다. 한국의 어느 도시든 봄, 여름, 가을까지는 무난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눈이 안 오는 영남 해안, 호남 해안 지역에서 특정 관광지의 겨울 풍경을 담는 건 쉽지 않다. 일 년에 눈이 한 번 올까 말까 한 울산과 부산에선 더 그렇다. 물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눈이 오지만 그마저도 그 양이 작다. 당연히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니 설경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동안 딱 한 번 울산의 설경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경주와 접한 울산 북구의 어느 고갯길을 담은 것이었다. 산에서 멀고 강을 중심으로 조성된 태화강국가정원에서 그런 폭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우린, 설경과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화려한 겨울 조명 축제는 영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대신 그 시기, 그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겨울 풍경을 담아내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lTO9H6FOw


울산시립예술단 홍보영상

이 일을 하다 보면 수정은 필수다. 조금이라도 추상적인 표현이 들어가면 광고주는 불편해한다. 광고주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제품의 특ㆍ장점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길 바란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그게 정말 중요한가 싶은 것도 있지만 의외로 많은 광고주와 고객들이 자기 생각만 한다. 예를 들어서 정치광고의 경우, 정치인이 자랑하고 싶은 자신의 강점과 유권자의 지지 이유가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 경우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자랑하고 싶은 걸 책자와 영상에 담아달라고 한다.


울산시립예술단 홍보 영상은 겨울에 시작해서 다음 해 봄에 마무리됐다. 늦가을에서 겨울까지, 여러 차례 미팅을 했다. 또 공연장인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극장과 그 내부에 자리한 산하 단체의 연습장도 꼼꼼히 둘러봤다. 그렇게 오랜 미팅과 답사 끝에 나온 카피다. 쓰는 건 단숨에 썼다. 써놓고 나니 전반부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목적성이라는 예술, 그 본연의 가치를 담고 있는 카피였지만 담당자를 비롯한 예술단의 결정권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짐작도 안 됐다. 카피는 수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더 추상적이고 은유적으로 해도 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였다.


촬영은 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이뤄졌다. 산하 합창단, 무용단, 교향악단의 모습이 두루 담겼다. 특히 카피의 메시지를 무용단이 그 신체를 통해 잘 표현해 줬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umWJ1cyKFgc


가능한 미래, 펼쳐질 책들

계약 해지, 며칠 후 제자이자 후배인 민우와 통화를 했다. 나에게 숨고 가입과 활동을 적극 추천한 인물이다. 통화를 하던 중 “네가 추천해서 거기에 가입한 이후 일주일에 두세 건씩 견적 의뢰가 오는데, 그동안 어디에 속한 몸이라 고객의 흐름만 파악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생긴 궁금증이, AI 시대에 왜 다들 그렇게 글쓰기에 집착하는지, 다들 왜 그렇게 그걸 배우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후배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후배는 이런저런 예를 들어 설명해 줬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이런저런, 할 것들이 있다. 이제는 견적을 원하는 이들에게 견적을 보내줘야 하고, 관련 분야 강사를 원하는 곳에 강사 등록도 할 계획이다. 딸의 방학기간 동안 아이패드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여러 프로그램과 애플리케이션을 다루는 법도 배우기로 했다. 읽어야 될 책도 쌓여 있다. 잠깐의 외도를 끝내고 다시 들뢰즈로 돌아갈 생각이다. 물론 짬짬이 에밀 시오랑과 자크 랑시에르,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와 슬라보예 지젝의 책도 읽을 생각이다. 서동욱과 백상현의 두툼한 책도 아직 펼쳐보지 못했다. 파스칼의 팡세도,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책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읽어 넣은 만큼 꺼내고 뱉어내고 싶다. 또 그래야만 하고.

다시, 돌아보니, 역시, 좋은 시절이었다. 감독에게 감사하다.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 그가 이 위기를 잘 넘어가길 바란다. 길면 일 년, 짧으면 몇 개월 정도 이어질 이 위기의 시간을 잘 버텨내길 기도한다. 언제, 다시, 우리는 다른 모습, 다른 관계로 만날 것이다.


커버는, 우리가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장소는 태화강국가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