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혹은 갈림길의 시작

by 최영훈

딸과 동행했던 며칠

지난주 후반은 딸의 영재 스케줄에 동행했습니다. 여름 방학 집중 수업이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죠. 저는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함께 했습니다. 목요일과 월요일엔 부산국제고등학교에 있는 언어영재교육원에, 금요일엔 부산국립국악원에 데려다준 뒤 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사이 시간을 보냈죠.


목요일엔 유명한 전포동의 독립서점 크레타에도 가 봤고 달라진 공구 상가도 둘러봤습니다. 금요일엔 국립국악원 내에 있는 북카페에서 세 시간 정도 책을 읽었고, 월요일엔 동의대 건너편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세 시간 정도 책을 읽었습니다. 딸은 아빠가 책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자기를 기꺼이 기다려주고, 심지어 가만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그 사이 시간을 더 반긴다는 걸 알고 있어서 혼자 남은 아빠를 걱정하지 않고 열심히 수업을 듣고 체험을 했습니다.

덕분에 아즈마 히로키의 두 책, <정정 가능성의 철학>과 <정정의 힘>을 다 읽었고, 북카페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인 <양을 쫓는 모험>의 1권을 반쯤 읽었습니다. 또, 다시, 아즈마 히로키의 첫 번째 책이자 그를 일약 유명 문예 평론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존재론적, 우편적>의 앞부분, 데리다의 이론을 정교하게 설명해 놓은 부분을 다시 읽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좀 더 이해가 가더군요. 그 사이 피곤해지면 에밀 시오랑의 <태어났음의 불편함>을 잠시 읽었죠. 이 책엔 맥락이 없으니까요.


그동안, 그러니까 지난 열흘 사이, 책과 독서, 문해력 교육과 관련한 몇몇 곳에 이력서를 보내고 각 구청에서 운영하는 평생 학습관에 강사 등록을 했습니다. 해운대구 담당자는 직접 전화를 해서 대학에서의 강사경력증명서를 올려주면 좋겠다고 해서 인근 주민센터에 가서 발급받아, 딸에게 PDF로 전환해 달라고 해서 올렸습니다. 최근엔 문해력과 독서 교육에 관한 원고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딸을 보면서, 책을 좋아하고 제법 공부도 잘해나가며 저도 당황시킬 정도로 어휘력이 좋은 딸을 보면서 딸이 크는 동안 나와 아내가 어떻게 했는지 돌아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사소한 습관과 지속해 온 철학이 지금의 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동안, 딸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일들은 기록해서 브런치북으로 만들어 놨고, 그 사이 읽은 책들도 다 사진으로 기록해 놔서 글의 자료는 충분하더군요.


딸과 친구들

며칠 전, 딸이 <군주론>에 관해 묻더군요. 집에 있었던 거 같아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내다 팔았거나 버렸나 봅니다. 물은 이유를 물으니 같은 반 친구가 추천해 줬답니다. 요즘, 딸과 대화하다 보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가 생각납니다. 학원과 학교에서 딸과 친한 친구들은 부산시의 영재이거나 학구열이 높은 친구들입니다. 반장은 IT 영재고, 영어 학원에서 만나 결국 수학학원까지 같이 다니는 영어 이름인 루시아는 수학 영재입니다. 어린이집 시절부터 친구였던 지유는 과학 영재죠. 또 초등학교 때부터 “남사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온유는 부산의 한 유명한 사립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전에도 한 번 말했는데, 저와 대화하다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서로에게 책을 권해줍니다. 온유는 <코스모스>를, 반장은 <사피엔스>를, 아빠가 경제학과 교수인 에스더는 <군주론>을, 루시아는 <이기적 유전자>를 추천해 줬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을 권해주는데, 서로의 성향이 다르다 보니 책 또한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애들은 계속 만나고 인문학 책은 빌리는 애들이 계속 빌리죠. 이런 애들은 학원도 서로 소개해줍니다. 수학 학원을 찾던 딸에게 자기가 다니던 수학 학원을 추천해 준 친구가 루시아였고, 에스더에게 그 수학 학원을 추천해 준 친구는 제 딸이었죠.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동기부여를 해주면서 동반 성장 하고 있습니다.


편한 이유

더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대화 상대가 된다는 겁니다. 딸이 공부하고 있는 영어영재 아이들의 말을 전해 들으면 영재원에 와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다고 합니다. 다들 자기가 뭘 잘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그 능력을 두려움 없이 표현하기 때문에 업무 분담이 빠르고 정확히 이뤄지기 때문이죠. 반면 학교에서 과제를 할 때는 다른 아이들이 소위 잘하는 애 능력에 편승하는, 소위 버스 탈 생각만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과제는 혼자 하는 게 많다 보니 재미가 없는 겁니다.


또 하나는 대화입니다. 이 아이들은 책도 좋아하고 공부 자체의 재미를 알고 있어서 읽은 책에 대해서, 공부 중 이해가 안 가는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나눕니다. 반면 학교에서는 이런 친구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죠. 여학생이라면, 아이돌이나 옷, 화장품에 관한 주제 말고는 화제가 없고 남학생이라면 유행하는 픽시 자전거나 스포츠 이야기가 주를 입니다. 이러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이렇게 자기와 비슷한 애들과 만나 함께 공부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겁니다.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말입니다.


7월에 마주 선 갈림길

얘기가 길어졌지만, 여하간 요즘 딸과 대화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문해력의 본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독서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서도 절감하고 있죠. 그때, 어쩌면 갈림길이 시작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죠.


이런 이야기를 어제, 아내와 한잔 하면서 나눴습니다. 여름휴가가 시작된 아내는 그 기념으로 동네 맥줏집에 가서 한잔 하자고 하더군요. 딸은 학원에 보내놓고 그렇게 두 사람은 다섯 시 반, 오픈런으로 맥줏집에 가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그 이후, 딸을 데리고 오면서 맥주를 더 사와 집에서 좀 더 마셨습니다. 모처럼, 많이 마신 날이었죠.


많은 일이 일어난 7월이었고, 이런저런 시도를 한 7월이었지만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7월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7월이 또 다른 인생길로 뻗어나가는 갈림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의 딸을 보면서,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기록해 온 딸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거, 우리의 사소한 행동이, 혹은 실천이, 혹은 결정이 지금의 전혀 다른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