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전쟁 - 빅토리아 아멜리나

동해선에서 읽은 책 151

by 최영훈

여성과 전쟁 : 우크라이나 소설가의 전쟁일기

원제 ; Looking at Women

Looking at War

: A War and Justice Diary


낯선 나라의 전쟁

2022년 2월, 딸은 4학년이었다. 우리는 그전 해부터 집의 인테리어 공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딸의 침실을 내 서재였던 방으로 옮겨주고, 딸의 기존 침실을 딸의 공부방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인테리어의 핵심이었다. 물론 그 외, 집의 거의 모든 부분을 싹 고치는 것도, 구조를 바꾸는 것도 포함 됐다. 이 계획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이 해,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일주일이면 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저항했다. 아, 이 사람들, 만만치 않은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대학원 시절 본 영화, 그 유명한 계단 장면이 나오는 <전함 포템킨>의 배경 도시가 오데사라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사를 중심으로 역사책을 몇 권 읽게 되면서 히틀러와 소련의 독재자들이 이 땅을 끊임없이 탐냈다는 걸 알았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군대의 방향을 돌려 모스크바로 진격했을 때, 군대를 쪼개어 우크라이나로 보내지 않았으면 2차 세계 대전은 다른 향방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국경선으로 동쪽으로 더 갔을지도 모르고 지금의 폴란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 결과론적이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안 했으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됐을지를 상상하는 것처럼.


현재 진행 중인 비극

그러나 이 책은 그저 역사책을 읽는 것처럼 읽을 수 없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십자군 전쟁에 끌려 관련 책을 읽을 때도 이런 불편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대부분의 전쟁사는 연대기적이다. 에피소드 중심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퍼시픽> 같은 드라마를 볼 때와 비슷하다. 전쟁의 발발, 군대의 이동, 지휘자의 전략과 전술, 크고 작은 전투의 개시와 전개, 각 지역의 전술적 가치, 각 전투의 전략적 의미, 전환점이 된 운명적인 작전들, 종전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가들, 막후 협상. 모든 것이 끝난 뒤, 여기저기 잠들어 있던 자료들을 모아, 써진 책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홀로코스트를 다룬 챕터조차, 앞서 말한 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느껴지도록 서술된다.


그러나 이 책은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진행 중인 전쟁에 관한 이야기다. 그 전쟁에서 구호 봉사자로, 전쟁 피해 조사자로, 저널리스트로, 작가로 활동하다 나아온 미사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남긴 글이다. 약 1년간의 기록이다. 무수히 많은 이름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곳곳의 지명이 나온다. 무명의 사람이고, 무명의 장소들이다. 현재는 그렇다. 과거의 전쟁을 다룬 책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가이거나 장군인데 반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금 당장은, 무명(無名)이다. 심지어 이 책조차 그렇다.


야만의 시대

그러나 장담하건대, 우리는 수십 년 안에 이 책을 한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야만의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초반, 2020년대, AI와 전기 자동차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과 하루만 비행기에서 버티면 어지간한 해외 도시를 갈 수 있는 이 시대에 왜 우리는 극우의 득세와 두 개의 전쟁의 발발을 막을 수 없었으며, 특히 그 전쟁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국제 사회가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 야만의 시대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리고 있는 미래는 2019년이었다. 우리는 그 미래보다 더 뒤의 미래를 살고 있다. 1980년대 말의 예술가와 영화감독이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던, 인류에게 완전히 다른 삶이 주어질 것이라고 상상했던 그 시기보다 훨씬 뒤의 미래를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 미래를 현재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진보했는가. 우리는 나아졌는가. 우리는 과거의, 역사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가. 인류는 과거로부터 뭘 배우긴 배웠는가.


기억될 책

정리되지 않은 책이다. 작가는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다. 열한 살짜리 아들과 함께 미완성의 원고와 수많은 메모를 남겼다. 그 아들을 돌봐줘야 될 의무가 있는 사람과 그 원고를 세상에 내놓을 의무를 안은 사람들이 그녀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더 먼 미래에 던져 놓는다. 그 의미는 정리되지 단락과 완성되지 못한 문장 사이에 담겨 있다. 낯선 지명과 긴 이름을 외울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은 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간 모두가 여기에 등장한 이름들을 기억할 날이 오지 않을까.


부제를 보자. Justice Diary다. 딸이 얼마 전 한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정의를 목소리에 비유했다. 말할 권리, 피해를 호소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정의라는 목소리를 뺏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법조인 되어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하면서 약소국, 나라 없는 민족들에게 그 목소리를 돌려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우크라이나에겐 목소리가 없다. 아니, 아직 귀 기울이는 사람이 적다. 아니, 그 목소리를 묻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극단주의자들, 강대국들, 야만적인 경제 논리로 더 소중한 인간의 가치를 묻어버리는 사람들.


이 책은 그 모든 방해를 뚫고 나온 하나의 목소리다. 이 책이 번역되어 한국에서 출판이 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멀리서 부르짖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겨우 도착한 느낌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이 목소리를 의무적으로 들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몇십 년 후, 이 시대를 돌아보며, 이 시대의 폭력과 야만을 이해하기 위해, 그 폭력과 야만으로 인해 사라져 갔던 많은 소중한 가치들과 목숨들을 기억하기 위해.


한 달 전쯤, 이 <파초>라는 출판사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됐다. 출판사는 이 책이 널리 읽히길 원해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남아 있는 책을 무료 나눔 했다. 난 댓들을 달았고 책을 받았다. 거듭 말하지만, 분량과 내용에 비해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낯선 이름과 지명 때문만은 아니다. 이 고통이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책을 더 무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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