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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산 - 파올로 코엘료

동해선에서 읽은 책 149

by 최영훈
“지금부터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쟁취하길 꿈꾸는 모든 것이 담긴 한 단어로 된 신성한 이름을요. 저의 이름은 이제부터 ‘해방’입니다.”, P.289


매일, 지역의 중고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업데이트된 목록을 본다. 인문학-사회과학-에세이 순으로, 그러다 가끔 소설/시/희곡 분야도 들여다본다. 며칠 전, 이 분야에 새로 올라온 소설 중 파올로 코엘료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 설명에 마음이 움직였다. 코엘료는 한 때 사랑했던 작가였다.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 미야베 미유키, 아루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와 함께 내 30대와 40대를 함께 했다.


집에 있는 파올로 코엘료의 작품은 여덟 개다. 이제 아홉 개가 됐다. 작가가 말했듯 이 소설은 <연금술사>에 담긴 그의 깨달음, 그것의 공백 혹은 더 깊은 뭔가가 담겨 있다. <순례자>, <연금술사>, 그리고 이 책은 일련의 성숙기라고 할 수 있다.


갈멜산의 기적, 그 전의 이야기

얘기의 주인공은 엘리야다.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예언자다. 교회도, 성경도, 인물도 낯선 이를 위해 잠시 소개를 하자면, 우선 열왕기상의 시대적 배경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이스라엘도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고 그 와중에 인근의 페르시아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들이 쳐들어 왔다. 그야말로 전쟁의 시대였다.


저 시대, 이스라엘의 왕은 이민족의 여자를 왕비로 맞았고 그 여자는 자신의 민족이 믿는 종교를 이스라엘에 서서히 이식한다. 그 와중에 이에 저항하는 유대교의 예언자 수백 명을, 말 그대로 몰살시켰고 엘리야는 살아남아 도피한다. 이 소설은 도피 이후의 삶, 도피한 도시에서 그가 성숙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은 성숙이나 성장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죽이는 방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법, 그러니까 과거의 나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를 제대로 장례를 치러 보내주고 스스로에게 새 이름을 부여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고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무너진 영광, 거품처럼 사라진 부와 명예....... 무역으로 명성을 쌓아 2백 년 간 명성을 떨쳤으나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 하룻밤 사이 무너진 아크바르라는 도시처럼, 이 모든 게 사라진 사람이 그 운명에 맞서 싸우는 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안온했던 나를 보내줘라. 과거를 그리워하지 마라. 죽은 김에 새 이름을 스스로 지어 준 뒤 새로운 나로 살아라. 작가는 성경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그 공백의 시간을 상상으로 메워 풀어내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름을 갖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하느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며 축복을 내리셨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얻지만,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말을 스스로 선택해 자기 삶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축복할 줄 알아야 한다.”, P. 281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세기 32장 24절~28절


Adiós, 최카피

앞서 다른 글에서 얘기했듯, 감독과의 관계가 정리된 순간, 내 카피라이터의 경력이 끝났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갖으며, 여러 생각을 하고 정보를 알아본 뒤 그 이름을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최카피라는 별명은 학생들이 지어줬다. 친한 예비역들이 넌지시 말해줬다. 애들이 날 그렇게 부른다고.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 별명으로 꽤 오래 살았다. 돈도 명예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최카피가 그렇게 좋았다. 그 뒤로, 현장에서도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고 또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그 이름으로 30대, 40대를 보냈다. 이제, 프로필에서 그 이름은 지울 생각이다. 전직이란 말은 어째 묘비명 같다. 그래서 그것도 뗄 생각이다.


오늘, 딸의 영어 스피치 대회를 갔다 온 후, <나 혼자 산다.>를 함께 보는데, <어쩌면 해피 엔딩>의 작가 천휴 씨가 나왔다. 재미있게 보는데, 아내가 불쑥 “당신도 글을 쓸 때 필명으로 해 봐.”라고 했다. 그 이름으로 잘 풀리면 아예 개명까지 해보라고 했다. 예전에도 종종 말했었는데, 이제는 진지하게 들린다. 필명이라.


얼마 전, 면접을 보러 가기 전, 염색을 했었다. 아주 진하게. 아내와 딸은 좋아했는데, 난 너무 싫었다. 지금도 그렇다. 다시 봐도 그렇다. 새로운 “나”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새로 지을 이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다들, 어느 분야에서, 어느 직장에서, 어느 직업에서 실패 “중”인가. 좌절 “중”인가.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아 불타고 무너지는 아크바르처럼 그렇게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가. 다 불 타 없어지게 놔둬라. 다 무너진 뒤, 다시 세우자. 한 도시의 장례를 치른 뒤 새 이름을 주자. 코엘료의 생각이다. 그래서 읽었다. 그리고 동의했다.


소설 속, 살아남은 주민들이 죽은 자들의 시신을 모아 화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매장의 풍습이 있던 그들에게 그 화장은 역병을 막기 위한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결단이자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과거와의 극적인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추모의 흔적조차 사라지는 그 장면.


괴롭다. 패전과 폐허의 과정과 죽음의 과정이 어찌 평온할까. 당연히 괴롭다. 이십 년을 동일시해 온 카피라이터라는 이름을 죽이는 데 어찌 평온할까. 수영할 때 사용하는 핀에도 써 놓은 그 이름을 영원히 보내버리는데 어찌 평온할까. 새 이름을 갖기 전엔 소멸이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댁들은 어떤가.


<나혼자 산다>에서 박천휴씨가 아침에 읽고 있던 책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어느 살인자의 고백>의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에디션이다. 10여년 전에 나왔고, 현재는 절판됐다. 한 때 팬이었는데, 대학도 들어가기 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지금도 <콘트라베이스>, <비둘기>, <깊이에의 강요>, <좀머씨 이야기>를 90년대 판본으로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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