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48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 지성의 체계를 이룬다고 인식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것을 통찰하는 세계관을 제공하는 하나의 전망(perspective)이자 지적 수단으로써 현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P.251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자본론의 해설서는 아니다. 그런 책을 기대한다면 고병권의 열두 권짜리 시리즈(난 절반 정도 읽었다.)를 추천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는 전망과 관점으로 오늘날의 세계와 나라, 사회와 공동체를 읽어나간다. 그래서 자본론에 나오는 어려운 개념을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자본론의 관점에서 역사와 지금 이 순간을 보면 무엇이 보이는지, 어떻게 보이는지를 말하고 있다.
더 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고전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근본적 차이 하나만 말이다. 우리도 잘 알고 마르크스도 공부했던 리카르도, 케인즈, 맬서스 등의 고전 경제학에선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인류 역사에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인류가 세상에 나오면서 자본주의도 따라 나왔고 역사의 성장과 함께 동반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의 오류는 인류와 인간이 가진 오류이자 허점으로 치환된다. 탐욕, 욕심, 이기심 등등.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가 역사의 어느 시점에 등장했다고 본다. 멀게는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대항해 시대와 겹친다.), 뒤로는 우리가 잘 아는 산업혁명 즈음해서. 그전까지의 경제 시스템은 사람 무리의 규모와 형태, 권력 구조와 정치 형태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어 왔을 뿐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그 자본주의 말이다. 저자의 논의를 간략히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봉건제의 붕괴, 자작농의 해체, 농촌의 붕괴, 뜻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던 직업의 자유를 강제받은 농촌 인력의 도시 인구와 산업 인력으로의 대거 유입, 이로 인한 잉여 가치, 즉 물건 본연의 가치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고용 및 경영 구조의 탄생, 이로 인해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자본가의 부의 축적과 그 반대로 이 시스템에 종속되어 버린 노동자... 이후로 현재의 신자유주의까지.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시작된 자본주의가 끝도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 끝은 혁명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 혁명들은 다 실패했지만.
“우리는 더 사치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사치를 누리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풍요로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P.268.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을 본 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들떠서 얘기했듯이 공산주의의 실패 뒤엔 자본주의의 생존만이 남아 있다. 정치적으론 민주주의와 함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관련한 책이 나오고, 여전히 그것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뭘까? 당연하게도, 저자가 밝혔듯이 여전히 하나의 시각과 조망(perspective)의 틀로, 방법으로 마르크스의 생각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여기며 견디며 살아왔던 것들을 달리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후반부, 그 대표적인,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저자는 서양 경제사 전문가인 오노즈카 도모지의 글의 상당 부분을 직접 인용한다. 그 내용은 특이하게도 영국 음식은 왜 맛이 없기로 유명할까,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였다.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앞서 말한 산업 혁명 시기, 또 그전에 두 번에 걸쳐 있었던 인클로져 운동으로 인해 영국의 농촌 공동체가 붕괴됐다. 당연히 우리나라 농촌처럼 매달, 매 계절마다 열렸던 축제 또한 사라지게 된다. 가난한 농부들도 작물이 아닌 자연에서 얻은 것들과 지주와 귀족의 배려와 기부로 확보할 수 있었던 귀한 식재료들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시도했던 요리들 또한 사라지게 된다. 물론 고급 식당에선 여전히 존재하지만 영국의 대중 음식은 산업 혁명 이후 그저 생존을 위한 음식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고쿠분 고이치로(내가 읽은 <들뢰즈 제대로 알기>의 저자이다.)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말했듯이 패스트푸드는 “단순히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뜻이 아니라 맛이 단조로워서 천천히 먹을 필요가 없는 음식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단조롭다는 것은 정보량이 적다는 말이다. 맛에 복잡함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맛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게 맞는지 따져봐야 한다. 이상한 걸 모두가 하면 정상이 된다. 그 이상함이 정상화된 세상 속에서 그 “이상함”을 알아채고 발견한 사람이 한두 명쯤은 있어야 한다. 정상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진짜” 정상적인 것의 보존을 위해서도, 진짜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과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살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음미를 위한 음식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도.
딱 십 년 전 이맘때, 정확히는 2015년 7월 31일, 한국 마르크스 경제학의 초석을 다진 김수행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2025년, 봄 학기, 개설된 지 35년 만에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가 폐강 됐다. 이 꼴을 안 보고 가신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참고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리고 현재도 꽂혀 있는 <자본주의 경제 산책>,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등의 저술을 남긴, 역시 마르크스 경제학자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논객이자 방송인이기도 했던 故 정운영 교수님은 김수행 교수님과 함께 경제과학연구소를 이끌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