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47
딸이 입원해 있던 올해 초(서평을 찾아보니, 정확히는 1월 3일 금요일, 오전 열한 시쯤), 그의 다른 책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와 조앤 디디온의 <내 말의 의미는>과 함께 이 책을 구매했다. 그 겨울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투병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겨울이기도 했다. 그 아픔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뇌리에 머물러 있던, 그 겨울을 견뎌내고 있던 마음이 불쑥, 나를 에밀 시오랑에게 안내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처방전.
일전에, 우연히 유시민 선생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본인은 니체 같은 스타일의, 그러니까, 뭐랄까, 아포리즘 스타일의 툭툭 던지는 류의 글은 도저히 못 읽겠다고 했었다. 나도 일정 부분 공감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도. 사실 대부분의 글은 구조가 있다. 서두가 있으면 결론이 있고 말머리가 있으면 끝머리도 있게 마련이다. 소설도 그렇고 에세이도 그렇고 당연히 철학책이나 인문학책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종류, 아포리즘 책들은 구조를 거부한다. 하나의 문장 안에 사람을 끌어들여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생각의 실타래를 엮길 바란다. 내가 갖고 있는 책 중에선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과 파스칼의 <팡세>가 그런 책이다.
"앞을 내다보지도, 뒤돌아보지도 말고, 두려움도 회환도 없이 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 과거나 미래의 노예로 남아 있는 한 아무도 자신의 안으로 내려갈 수 없다." P.143
"한 권의 책은 지연된 자살이다.", P.168
읽다 보면, 불쑥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존재와 삶이 역겨우면 죽으면 될 일 아닌가.’ 첫 장부터, 끝장까지 긍정은 없다. 존재와 육신의 부피가 버겁다. 태어나서 살아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힘겹다.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그 당위를 획득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도 역겹다. 삶은 지옥이고 이름은 묘비명에 가까우며 미래는 채무자처럼 버티고 서 있다. 거기엔, 그 미래엔 희망이 없다. 살아낸들 달라질 건 없다. 다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속세를 떠나면 될 일 아니었던가. 절이나 수도원 같은 곳을. 어차피 당신은 가진 것도 없고, 직업은 물론 처자식도 없었으니 딱히 버릴 것도, 미련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욱신거렸다. 그 욱신거림은 단순한 진통이 아니었다. 손매가 매서운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내 몸 구석구석, 뭉치고 막혀 있는 곳곳을 절묘하게 찾아 만질 때 발생하는 진통 같았다. 근육과 몸이 풀려야만 하는 곳은 만지면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는 걸 안마사는 나에 내지르는 괴성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등을 만지며, 내 등 뒤에서, 비명을 들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픈 곳을 제대로 만지고 있구나. 할 일을 정확히 하고 있구나. 난 역시 프로야. 이런 만족감을 가진 채.
그는 견뎌낸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면서 평생 가난하게 살며 글을 썼다. 그것도 모국어인 루마니아어가 아닌 공부를 한 뒤 눌러앉아 살았던 프랑스어로. 1911년생인 그는 심지어 1995년, 여든을 넘겨 죽었다. 게다가 유명한 문학상의 수상자로 지명됐으나 그 상마저 거부하면 노숙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수상을 수락한 1950년의 리바롤 상을 제외하면 모든 상을 거부했다. 직업도 없었고 결혼도 안 했으며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당연히 문인들이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산책을 하고 글을 썼으며, 파리에 있는 여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마흔이 될 때까지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서 안마사 같은 존재가 됐다. 삶의 아픔과 위선을 콕콕 짚어대는 글을 썼다. 시작도 결말도 없는 그 글의 파편은 안마사의 불거진 손가락처럼 우리의 삶의 맥과 경락과 굳은 마음을 짚어간다. 그 유명한 대사를 빌려와 말하면 그는 우리에게 “아프냐? 나도 아팠다.”하고 말하는 것 같다. 아프다. 그게 인생이다. 그러니 잠시 좋은 날이 왔다고 호들갑 떨지 말고 잠시 우울한 날이 찾아왔다고 너무 자빠져 있지 마라. 아프냐? 나도 아팠고 모두가 아프다. 견뎌내자. 그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종교적 위로가 없다. 기독교의 구원도 없고 불교의 무위도 없다. 삶, 그 자체를 어떤 형태로든 외면하는 건, 역설적이지만 삶이 아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은 당연한 것인데, 그 고통 때문에 신 “따위”를 찾고 속세를 떠나면서 고통 그 자체를 무로 돌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아프냐? 그게 삶이다. 견뎌라. 힘드냐? 그게 삶이다. 도망가지 말아라. 아프다는 걸 미리 알려 줄 테니 견뎌라. 에밀 시오랑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위선적인 광신자는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P.64
"그 무엇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자만이 확신을 가지는 법이다.", P. 224
"살아 있는 동안 잊히는 행운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현자의 조건에 접근할 수 없다.", P.311
우리는 현자가 될 수 없다. 다만 작가가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삶에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고통을 담담히 응시하며 살아가는 이라면 그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삶을 무한 긍정하고, 자기 계발의 한계를 모르며 신이 삶의 무궁한 기쁨의 원천인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작가들은 가장 정직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신형철이 <몰락의 에티카> 서문에서 밝혔듯이 문학이 삶의 몰락, 몰락한 인생을 드러내 보여주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는 건, 작가들만이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작가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걸 말하는 이들이다.
하여 다시 말하지만,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본 것을 자기가 아는 단어로 담담히 옮겨 적을 수 있는 사람은 말이다. 설교도 아니다. 주장도 아니다. 권유도, 회유도, 유혹도 아니다. 설득도 아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게 다다. 에밀 시오랑도 그렇다. 삶이랑 이런 거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아직 덜 살았거나 아직 솔직할 용기가 없는지도. 아무렴 어떠냐. 너나 나나 견디긴 매한가지니, 너도 고생이 많다.
얼마 전 아내가 쇼핑 사이트를 보고 있기에 가방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은채랑 함께 움직일 때 들고 다닐만한 크기로, 책 한 권, 지갑, 휴대폰, 선글라스, 손수건 따위를 넣으면 딱 좋을만한 적당한 크기의 가방이. 아내는 마침 그날 저녁에 쇼핑 라이브를 준비 중인, 평소 좋아하는 가방 브랜드의 제품을 보여줬고 난 그중 맘에 드는 것을 하나 골랐다. 이런저런 할인이 더해져서 2만 정도면 살 수 있는. 구매를 해줬고 어제 도착했다. 딸도 마음에 들어 하고 아내도 마음에 들어 할 뿐만 아니라 나도(?) 맘에 들었다.
덕분에 오래된 작은 가방 몇 개를 버리기로 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PIFF였던 시절에 산 두 개의 가방, 2004년에 나갔던 마라톤 대회에서 준 가방, 그리고 막 슬링백이 시장에 나왔을 때 아내가 사줬던, 요상하게 생겼으나 수납공간은 형편없었던 가방까지. 하나를 샀는 데, 네 개의 가방을 버리게 됐다. 이렇게만 된다면야 짐이 줄어들고 삶이 가벼워지는 건 금방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