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온한 것들의 미학 - 이해완

동해선에 읽은 책 144

by 최영훈

서가명강의 이름값

강의를 옮긴 책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기술(記述)되어 나온다. 하나는 강의의 육성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이정우 선생의 책들 중에 이런 것이 많은 데, <접힘과 펼쳐짐>, <주름ㆍ갈래ㆍ울림>, <개념 : 뿌리들>이 대표적이다. 앞의 두 책 안엔 학생의 질문과 저자의 가벼운 농담까지 생생하게 실려 있을 정도다. 다른 하나는 강의록이나 강의안을 토대로 새로 책을 쓴 것이다. 사실상, 학자들의 책들은 대체로 이러하다. 이해완의 책은 후자에 속한다.


이런 책, 강의를 옮긴 책을 고를 때는, 또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학자를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만의 인문학 공간을 만들어 거의 매일 토크를 하다시피 하는 아즈마 히로키, <야전과 영원> 출간과 맞물린 동일보 대지진 이후 일본 전역에서 펼쳐진 다양한 대담에 참여한 사사키 아타루의 경우라면 그 수많은 대화와 강연 중에서 고르고 골라 담은 책이라면 믿을만하다. 다른 하나는 그 학자가 속한 무리나 학회, 학교의 이름값, 명성, 학문적 행보를 믿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아마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21세 북스의 서가명강 시리즈는 후자의 경우다. 서울대학교의 유명한 강의를 옮긴 것이니 말이다. 물론 학교 이름값에만 기댄 시리즈는 아니다. 김상환 교수의 <왜 칸트인가>, 박찬국 교수의 <사는 게 힘들 때, 쇼펜하우어>를 읽어 본 결과, 학교의 이름은 책을 파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됐으리라 판단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완 교수의 이 책도 책 자체의 완성도만으로 충분히 팔릴 만한 책이다.


아웃사이더 미학, 미학의 바깥

이 책은 미학 책이다. 그런데 약간 삐딱하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종종 미학이나 영화 관련 책이나 그 분야가 응용된 철학 책을 사서 보는데, 이 책은 그렇게 읽은 책 중에서 후지타 나오야의 <좀비 사회학>만큼 삐딱한 책이다. 한 마디로 굳이 이런 걸 미학의 맥락에서 논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것들, 논의의 장에 끌어오기엔 그 사안이 첨예하거나 난감한 것들, 심지어는 약간은 터부시 되어온 것들, 더 나아가 B급으로 취급받은 것들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네 개의 챕터의 주인공 격인 소재를 나열해 보자. 우선은 위작의 문제다. 두 번째는 포르노그래피, 세 번째는 농담과 유머, 네 번째는 공포 영화다. 최소한 난 첫 번째 소재를 미학의 맥락에서 다룬 글은 어디선가 읽어 본 기억이 있지만 나머지 세 개에 관해선 읽어 본 기억이 없다. 실제로 읽으면서 확인을 했다. 물론 이 네 개의 소재에 친숙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본질적으로 첫 번째 소재에선 예술의 조건, 진품을 진품이게 하는 조건을 따져 묻는다. 그 논의의 전개가 완벽한 위작, 세계를 속인 위작, 진품을 그린 작가의 유작이라고 수십 년 간 평가받았던 작품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진품과 똑같은 위작이라면, 우리가 진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작품이 위작이라고 밝혀졌다고 해서 새삼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위선”아니냐며 따지는 쪽과 예술이 예술일 수밖에 없는 이유, 진품이 그 진품의 아우라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항변하며 반대쪽에 서 있는 쪽의 대립을 그 양편의 작가와 학자들의 이론을 빌어 와 싸움을 붙인다. 뭐, 언제나 그렇듯, 싸움 구경은 재미있다.


두 번째 챕터에서 다룬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는 그 콘텐츠의 효과 문제와 윤리성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에서 펼쳐진 논의도 흥미진진했는데, 예술에 가까운 포르노그래피 “아트”와 포르노그래피만큼 충격적인 장면을 담고 있는 “예술”영화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어디서부터 도출될 수 있는지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세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과거 포르노그래피를 볼 때-그렇다. 나도 혈기왕성했던 때가 있었다. - 들었던, ‘아니 굳이 이렇게까지 잘 만들 필요가 있나. 어차피 포르노그래피는...’했던 생각의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잊지 말자. 말과 글과 영상의 목적과 효과의 지향점 안에 윤리적 지향점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포르노그래피는 포르노그래피일 뿐이다.


세 번째 챕터의 농담과 유머도 윤리적 문제, 특히 소수자, 약자, 웃음의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 네 번째 챕터에서는 공포 영화를 중심으로 쾌와 불쾌의 문제, 특히 불쾌의 여러 감정들의 집합체인 공포 영화를 우리는 왜 보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사족

집에 읽고 싶은 책, 표지만 봐도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 잔뜩 있어서 책의 진도가 좀 느리거나 그 진도가 절반을 넘어가면 조바심이 난다. 그 조바심을 이겨내면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젊은 시절엔, 마음이 심난할 때마다 여자의 품을 찾았다. 남자의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 건 오직 여자의 품뿐이라고 생각했고 믿어 왔다. 물론 지금도 이 믿음엔 변화가 없다. 다만 “여자”가 없을 뿐이다. 대신 가족이 있지. 그러나 더 나이가 드니 모든 소란스러움을 끄고 가만히 책을 들여다볼 때, 마음의 소란도 잠드는 것이 느껴진다. 잠시 잊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조용히 가라앉는 것이다. 짖던 개가 조용해지는 것처럼.


아직 젊다면 자신의 소란한 마음을 연인의 품에 맡겨라. 아직 책 따위를 펼칠 필요 없다. 그러나 언젠간, 책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올 것이다. 그때, 그날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책을 읽어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