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각의 싸움 - 김재인

동해선에서 읽은 책 152

by 최영훈
“인문학은 확고한 자존감을 세우고 행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되,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윤리다.”, P.15


말을 글로 옮긴 책

강의록을 옮긴 책들은 쉽게 읽힌다. 강의의 대상이 대체로 강의를 하는 자보다 그 지식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다. 교수와 학생, 선생과 학생의 관계 사이에서 강의가 진행되니, 당연히 교수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의 언어가 아닌 학생의 언어로 번역하여 강의한다. 얼마 전 만난, 무려 30년간 학원가에서 과학을 강의한 강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그러니 어떤 분야든,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의 입문서를 찾는다면 강의록도 후회 없는 선택이다. 철학, 인문학 쪽에서는 이정우, 강신주, 이진우, 고병권 등의 저자들이 이런 류의 책들을 냈다.


이만큼 쉬운 책은 온라인상으로 소통한 말과 글을 책을 묶어 낸 것이다. 또는 강연이나 대화를 하면서 유튜브 등으로 중계까지 한 것을 옮긴 책이다. 이 분야의 선수로는 사사키 아타루를 빼놓을 수 없다. 2011년부터 몇 년을 터울로 내고 있는 아날렉타(Anarekuta) 시리즈에는 온갖 종류의 “텍스트”가 문자로 취합되어 있다. 다루는 주제 또한 다양해서 어떤 걸 읽든 재미가 보장된다. 개인적으론 <이 나날의 돌림노래>를 빼고는 다 갖고 있다.


김재인의 생산력

이렇게 서두를 길게 뺀 것은 김재인 교수의 이 책은 특이하게도 팟캐스트를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철학자 중 생산력만 놓고 보면 단연, 요즘 친구들 말로 표현하면, 1 티어 아닐까? 번역, 공저자로 참여한 것까지 합하면 그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이 서른 권이 넘는다. 그가 2015년까지, 약 십여 년간 단돈 300만 원 정도의 돈만 받고 <안티오이디푸스>의 번역에 매달렸다는 걸 감안하면 저 삼십 여권의 의미가 더 크게 와닿을 것이다. 참고로 그의 첫 번역작은 들뢰즈의 <베르그손주의>인데, 군대 가기 직전에 했다고 한다. 때문에 책의 실물은 군대에서 봤다고.


이런 그의 텍스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 데 하나는 들뢰즈, 들뢰즈/과타리의 철학을 중심에 놓고 있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비교적 최근작인 <인간은 아직 좌절하지 마>와 <공동 뇌 프로젝트>, 그리고 몇 년 전 출판된 <AI 빅뱅>,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등의 저서는 얼핏 그 범주를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 텍스트를 관통하고 있는 큰 물줄기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믿음, 인문학에 대한 기대, 철학의 필요이다. 이 책, <생각의 싸움>은 뒤에 두 권의 출간, 그 사이에 나온 책이다.


철학 종합선물세트를 고르기

철학사를 다룬 책은 많다. 천 페이지가 넘는 책도 있고 3,4백 페이지 안에서 가볍게 다루고 있는 것도 있다. 심지어 야마구치 슈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3백 페이지 갓 넘는 분량 안에 50여 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다. 그가 비즈니스 인문학을 표방하면서 관련하여 일본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감안하여, 이 분량과 인물의 부조화를 이해하자. 여하간, 이런 이유로 서양 철학사나 서양 철학 입문을 위한 책을 고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과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책을 권하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권해도 욕을 먹지는 않을 것 같다. 이유야 여러 가지다.


우선은 쉽다. 김재인 교수의 글은 상쾌한 맛이 있다. 가볍게 던지는 스트레이트 같은 느낌이다. 철학자라면 어려운 단어와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기 마련인데 김재인 교수는 그걸 혐오하지 않나 의심이 들 정도다. 그가 쓴 어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들뢰즈 철학을 다루고 있는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조차도 술술 읽힌다.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도 분명 그렇게 읽힐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또한 그의 개성이라면 개성인데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린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범하는 흔한 실수라면 실수가 자칫 다루는 인물과 주제가 너무 많고 넓어, 단순 소개에 그치는 것이다.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인물 소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재인 교수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꼭 소개해야 할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 사람의 학문과 이론, 철학 중에 알았으면 하는 것, 알아야만 하는 것만 말한다.


그의 이런 장점은 바로 세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그는 철학이 필요한 상황, 철학으로 말해야만 하는 주제, 또는 그 주제를 말할 때 필요한 철학“만” 이야기한다. 즉, 철학과 철학자를 소개하려 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과 이 사회에 필요한 화두, 저자가 생각하기에 꼭 필요한 철학적 이슈“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가 끌어들인 싸움터

책으로 들어가 보자. 철학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와 니체를 다룬다. 탈레스는 그렇다 쳐도 니체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개의치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팟캐스트다. 게다가 철학은 현재 진행 중이다. 최근에 산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20여 명이 넘는 학자 중에서 아는 사람은 퀑탱 메이야수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어딘가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고 저자는 니체를 호명했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철학의 본질은 우리의 안일한 생각을 흔들어, 종국에는 우리의 안온한 삶에 의심의 눈초리를 두게 하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망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망치, 니체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챕터를 더 들어가 보자. 앎의 싸움이 첫 장이다. 베이컨, 데카르트, 흄과 칸트가 나온다. 그림이 그려진다. 지독한 경험주의자들과 지독한 이성주의자들의 대결 구조다. 영국과 대륙 철학의 대결이기도 하다. 경험으로 안 것만이 아는 것의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이성과 선험적 요소를 말한 이들의 논쟁이다. 후자는 앎, 그 너머를 얘기한다. 특히 칸트. 그리고 여기서부터 소위 프로페셔널한 철학이 시작된다.


두 번째 장은 있음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오고 베르그손이 뒤를 받친다. 있기는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사유의 실타래가 길게 이어진다. 이데아, 시간, 가능성. 이 논의들은 후에 현상학과 라캉, 들뢰즈 등의 사유로 이어진다.


삶의 싸움으로 넘어가면 더 실질적인 싸움판이 벌어진다. 인간의 기능과 도덕,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참된 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삶과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통해 말한다. 스피노자를 통해 앎과 경험, 관념의 획득 과정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기쁨을 소개하고 그 유명한 스튜어트 밀의 입을 빌어 자유를, 푸코의 생각을 통해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권력과 그 권력이 만든 지식 체계, 그로 인해 우리가 상실했던 자유와 그 복원의 가능성, 마지막으로 주체의 온전한 삶의 가능성을 자기 배려의 철학으로 말한다.


그와 책의 미덕

이 책엔 낭비가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할 말로 꽉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사람을 몰아세우진 않는다. 장마다 슬쩍 운을 뗀다. 친구를 소개하듯 학자들을 가볍게 소개한다. 본격적인 싸움판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전에 전반적인 학문 세계도 소개한다. 그야말로 워밍업을 제대로 한 뒤에 본론으로 들어간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면 낭비 없이 채워간다. 물론 가벼운 농담 같은 구절도 있는데, 이 또한 복선이다. 맥거핀이 아니다. 그러니 결국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지만 쌓이는 생각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장점 하나를 더 소개하자면 인용한 학자의 본문은 직접 인용하고, 그 인용된 전체 페이지를 뒤에 소개한다는 점이다. 발췌 독서라면 독서다. 마지막으로, 각 장 끝에 질의/응답 형태의 논의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에 실제 팟캐스트 상황에서 이뤄진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그 내용을 정리하면서 붙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철학이 어떻게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족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읽는 사이 다른 책을 읽은 탓도 있고, 또 그사이 여러 심란한 일을 겪은 탓도 있다. 이제는 몸을 의탁하여 재능을 발휘할 곳이 있어 심란함은 잡혔다. 덕분에 책을 읽는 속도가 제법 붙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연재도 끝난 마당에서 독자와 더 자주 만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이 읽어야 하지 않겠나. 진정한 독서가라면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지만, 그 속도 차이가 요즘 너무 벌어져 민망할 지경이다. 뒤에 처진 것의 속도를 높여 그 차이를 좁혀 볼 생각이다. 물론 이 또한 헛된 희망일 수 있으니, 카드 결제 속도를 어찌 따라가겠나.


다음 달부터 이 매거진의 이름을 바꾸려 한다. 내가 속해 있는 곳의 이름을 빌어 "의문에서 읽은 책"으로 가련다. 그 이유는 그때가 되어 설명하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