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53
“저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소문은 대체로 진실 그 이상이거나 이하다. 또, 사실 그 이상이거나 이하다. 명성도 마찬가지다. <필경사 바틀비>는 멜빌의 그 유명한 소설 <백경>처럼 소문과 명성이 무성한 소설이다. 읽지 않은 사람조차도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을 정도의 소설, 그것도 단편 소설이라면 그 소문의 파급력이 상당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파급력은 때론 소문의 주인공에게 독이 되곤 하는데, 앞서 말했듯 소문과 명성은 진실 또는 사실과 어긋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위 “카더라”통신은 진실과 사실에 거품을 잔뜩 입힌 채 도착하기에 막상 그 “카더라” 통신의 수신자는 거품을 걷어낸 뒤 남은 진실과 사실의 앙상함에 망연자실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어떨까? 들뢰즈가 사랑했던 소설, 그리고 지젝이 사랑했던 소설, 그래서 저 유명한 대사를 티셔츠에 새겨 뉴욕 한복판에서 이어졌던 반 금융 자본 시위에 입고 등장하기까지 했던 전설의 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거품의 두께는 얼마나 될까? 많다면, 걷어낸 뒤 그 앙상함에, 나 역시 실망한다면, 이 얇은 책에 몇 천 원조차 난 아까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 이상이었다.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처럼,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다 알다시피 내용은 간단하다. 배경은, 19세기 중반, 월 가의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월가의 역사 막 가파른 성공의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 한 변호사의 사무실이다. 변호사는 여러 서류를 베껴 쓰는 필경사를 두 명, 잔심부름을 하는 급사를 한 명 직원으로 두고 있었다. 일이 많아지면서 필경사를 한 명 더 고용하게 되는 데, 그가 바틀비다. 문제가 없었다. 일도 잘한다. 안색이 창백하고 말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러던 어느 날, 원본과 복사본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 비교를 도와달라는 지시를 하자, 바틀비는 거절한다. “저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 봤다. 저 말의 원문은 뭘까? I would prefer not to다. 선택의 단어로 "prefer"는 생소하다. 알다시피 영어로 “선택”에 해당되는 단어로는 Select와 Choice가 있다. 더 쉬운 표현으로는 Pick도 있다. 참고로 이 중 Pick이 가장 즉물적이다. 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Prefer가 중요하다. 직역하면 “선호하다.”이지 않나. 그러니 저 문장은 “전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문법적 어긋남이 발생한다. 우리가 배운 영어로는 “I would not prefer to...”가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면 “난 그걸 선호하지 않습니다.”가 되겠다. 이 차이가, 이 표현의 사소한 차이가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다. 바틀비의 거부는 “그것”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 자체를 “선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의 파악에 실패한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계속 일을 시킨다. 그런데 처음엔 사소한 잡무, 필경사 본연의 일 외에의 업무를 거부하던 바틀비는 필경사의 업무까지 거부하는 지경에 이른다. 당연하게 그 거부를 낱개의 업무에 대한 거부로 이해하고 있던 변호사는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뭔가를 하기를. 왜일까? 뭔가를 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변호사의 세계관에선 정상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내 밑의 직원으로 들어왔으면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조직이나 직장의 규칙에 따르는 것이 정상이다. 좀 더 넓게는 한 사회의 관례와 규범을 따르는 것이 정상이다. 더 넓게는 국가라는 시스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규칙과 규범에 따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게 싫다면? 벗어나야 한다. 그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바틀비는 나가는 것, 그 자체까지도 선호하지 않는다. 이 지점이 이 인물의 “거부”를 진정한 저항으로 격상시키는 지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그 자체, 떠남 자체도 거부하는 바로 이 지점이 말이다. 이 지점에서 첫 번째 질문이 나온다. 왜일까? 이 저항을 지젝도, 들뢰즈도 수동적인 저항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형태의 저항이라고 극찬하는 것일까? 시스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바틀비는 혁명을 꾀하지도 않는다. 잘 못 된 것을 고치려 하지도 않는다. 이 책의 해설을 단 성기현 씨가 예를 든, 기차 안에 내재된 부조리함과 불평들을 해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는 <설국열차>의 꼬리 칸 사람들과 유사한 꿈을 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설은 단 성기현은 <설국열차>에서의 벗어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벗어나야만 하는가. 바틀비가 묻는 첫 번째 근본적 질문이다. 세상이 정상이 아니고 내가 정상이라면 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틀비는 모든 걸 거부한 끝에 수감된다. 그는 그곳에서 먹는 것조차 거부한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격리되어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책임과 의무로 삼는 교정 시설인 교도소에 갇힌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교정마저, 거기서 죽는 음식마저 거부한다. 거부하다 결국엔 죽는다. 권력도, 자본도, 시스템도 무죄다. 그는 굶어 죽었다. 이 죽음이 던지는 질문은 뭔가?
두 번째 근본적 질문이 이어서 나온다. 죽지 않고 이 사회에 존재할 수는 없는 건가? 이 시스템, 이 사회에서 탈주하지 않고, 적응하지 않고, 뭔가 하나 정도는 선택하라는 이 사회와 자본주의의 강력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 건가? 바틀비와 같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이”에게 허락된 한 뼘의 땅은 없는 건가? 그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거부하는 이”는 결국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죽어야만 하는가?
이 사회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그 어떤 뭔가도 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없는 사람을 따로 구분하여 관리한다. 법적으로 보호하고 심지어 관리한다. 복지정책의 일환이다. 불가능함을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사람, 후천적으로 그 불가능함의 불행을 가지게 된 사람은 국가가 책임진다. 그렇다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안한채 그저 존재하길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하는가? 사람 앞에 놓인 문제의 보기 중 “안 해도 됨”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가? 그건 불가능한 상상인가? 그저 존재함은.
세 번째 근본적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 사회가 납득할 수 없다면, 그 존재의 당위성에 합의할 수 없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이 확보될 수 없는 건가? 인간의 존엄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존재인가 행함인가?
우리는 이쯤 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내야만 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이 있었던 이는 바틀비였다는 것을, 변호사는 변호사로, 직원 세 명은 모두 별명으로 불렸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변호사는 사회적 지위다. 전문성의 징표다. 이것을 가진 이는 이름 뒤나 앞에 그것을 붙인다. 변호사 000, 00 박사, 의학박사 000, 이런 식으로 말이다. 또, 별명은 자기가 붙이는 것이 아니다. 소설에서 보듯이 타인으로부터 부여받는다. 일종의 낙인이다. 원하지 않는 호명이다. 부름 받음이다.
결국,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묻는 것은 사람의 존재"함", 그 당위성의 근원이다. 그 존재의 그러함을 받아들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타인의 호명 없이도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 위치 지울 수 있는 방법, 이름 앞이나 뒤에 붙는 그 무엇도 없이, 그러니까 사회적 지위나 회사 내에서의 직함, 전문직종을 나타내는 소위 “사”자 따위 없이 자신의 이름만으로도 이 사회에 존재할 방법은 없는 건가? 역설적이게도 남이 불러주는 이름과 같이 사회와 타자가 호명할 수 있는, 인정할 수 있는 것 없이 존재할 방법은 없는 건가? 이 소설은 계속해서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이 사회에, 이 시대에, 이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모두에게 던져진다. 무엇을 해서 그 필요를 입증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그 “함”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다. 도교의 무위(無爲)처럼 말이다. 이제 이 질문은 허먼 멜빌이 세상에 내놓은 바틀비의 목소리를 통해 반복된다. 그 목소리에 담긴 질문은, 성기현이 지적했듯, 끊임없이 집요하게 고래를 쫓는 <모비딕>의 에이허브 선장의 그 강박을 닮은 우리의 강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인류는 어느 순간 바트빌처럼 굶어 죽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AI가 그 생각을 대신해 주고 로봇들이 육체적인 일을 다 해주는 사회가 왔을 때, 인간은 어디서 존재의 당위성을 획득할 것인가? 그 획득에 실패하면 바틀비와 같은 최후의 선택을 할 것인가? 아직 인간이 무엇의 함을 통해 그 존재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의 생존, 그 자체의 당연함을 긍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먼 미래를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판본이 많다. 난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에디션으로 읽었다. 관련 학자들의 해설이 소설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에디션이다. 재미있는 건, 해설과 소설이 거꾸로 인쇄되어 있다. 그러니까, 해설을 읽고 싶으면 책을 180도 돌려야 한다는 것. 해설이 해설 이상이다. 소설을 읽은 이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