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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무라카미 하루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154

by 최영훈

일상에선 공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차가운+사랑, 뜨거운+이별, 담담한+모험 같은 것들이다. 지루한+이십 대, 안정적인+이십 대, 생생하게 말을 거는+유령, 평범한+매력남, 당연하다는 듯 일어나는+돌발적인 사건, 한 입에 먹는+뜨거운 라면도 어쩌면 이런 조합일 것이다. 이런 건 소위 시적 허용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이 모든 조합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 아니, 당연하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부조화의 조화들이 스윽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인생에 자연스러운 것들의 그럴법한 등장이 몇 번이나 되던가.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인생에 등장했던 대부분의 것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치 2인용 의자에 엉덩이부터 들이밀어 결국은 자기 자리를 만들고 마는 파렴치하고 뻔뻔한 중년의 아줌마처럼, 우리 인생에 들어오는 사건들은 애초에 그렇게 들어온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생은 이런 사건의 연속이다. 만연하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십 대의 끝, 열도의 끝

이십 대 후반에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고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본 남자가 있다. 그렇다고 스티브 잡스나 주커버그처럼 수조 원대의 대박을 터뜨린 것 아니다. 1970년대 말의 일본에서 가문과 배경에 기대지 않고 그저 자신이 배운 것과 가진 재주로 번역도 하고 광고 카피라이터 일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쉬운 것 없이 살고 있다. 동업자인 친구는 애도 있고 장기 대출로 샀지만 제법 그럴듯한 맨션도 있다. 둘 다, 차도 있다. 이 중 맨션과 애가 없는 주인공은 아내와 이혼했다. 그저 그런 재즈 기타리스트와 바람이 난 아내를 무덤덤하게 보내줬다. 아쉬운 건 없다. 고양이가 있고 담배를 살 돈과 위스키를 마실 돈, <셜록 홈스의 사건집>도 손에 들려 있다. 심지어 엄청나게 신비한 매력을 발산하는 귀를 가진 애인도 새로 생겼다.


이 덤덤한 남자에게 “사건”이 생겼다. 일일이 다 설명하긴 어렵다. 친구에게 몇 통의 편지가 왔고, 그 편지에 동봉된 사진 중 맘에 드는 사진을 한 보험회사 광고에 사용했다. 그 광고를 본 누군가 - 막후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누군가 - 가가 그 사진에 찍힌 “양”을 찾아달라고 한다. 기한은 한 달. 못 찾으면 곤란해진다. 남자는 잃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욕심도 없다. 그러나 약속을 했으니 양을 찾아 북해도로 떠난다. 소설의 후반부는 이곳에서의 일이다.


개인을 통과하는 역사

한 사람의 인생 속에 역사가 관통한다. 아니, 바꿔 말하면 역사는 언제나 개인의 삶을 관통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역사의식이 없다거나 너무 미시적 일상에 천착한다고들 하는 데, 역사는 결국 그 일상을 통해 실천된다. 역설적이게도 거시적 역사는 오늘의 미시적 실천의 누적으로 만들어진다. 또 반대로, 역사는 현재를 사는 모든 이의 미시적 실천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강의 수원엔 하나의 작은 샘물이, 그 샘물로부터 발원한 작은 계곡과 실개천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굵은 동맥과 정맥 주변에 작은 혈관들이, 모세 혈관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덤덤한 듯하면서도 기묘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 작가는 무심히 일본 근대사를 점점이 뿌려놓는다.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등장하는 1930년대의 만주 침공, 그전부터 시작된 일제 강점기, 이후의 2차 세계대전과 전후 일본의 성장,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일본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NHK 아나운서의 목소리처럼 담담히 넣는다. 그 역사적 사건, 정부의 급격한 정책 변화, 한 개인에게 하달된 정부와 조직의 지시는 분명 개인은 물론이고 그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영향에 대해, 개인의 무력감에 대해, 부조리함에 대해 큰 목소리로 울부짖지 않는다. 지금 여기 사는 사람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다들 그러고 살지 않나? 오히려 우리에게 반문한다. 우리가 당장 답을 얻어야 할,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제나 그렇게 주장한다. 역사적 사건을 어제 나온 급식 메뉴처럼 무미건조하게 나열한 뒤 해결해야만 하는 오늘의 사건으로 바로 돌아간다.


“나도 가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도대체 무얼 찾으면 되는 것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겁니다. 저의 아버지는 줄곧 무엇인가를 찾으시던 어른이랍니다. 지금도 찾고 계시죠. 저도 어려서부터 계속 아버지의 꿈에 나타났던 흰 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지요. 그래서인지 인생이란 그런 것이구나,라고 믿어버리게 된 겁니다.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것이 진짜 인생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권, P74.


삶은 거기 없다.

무미건조하게 생긴 <이루카 호텔>, 번역하면 돌고래 호텔의 지배인이 한 말이다. 지배인은 이 호텔 건물주의 아들이니 사장이라 할 수 있다. 사장은 그 “양”이 들어왔다 나간 후 그 나간 “양”을 찾고 있다. 양을 쫓는 이의 선배 격. 지배인은 <백경>에 감동받아 호텔 이름을 “돌고래”라고 지었다고 했다. 범고래나 흰 수염고래는 호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알다시피 <백경>은 “고래”를 쫓는 모험이다. 복수를 위해서 말이다. 그 선장도 고래를 찾는 것이 진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찾아야만 하는 것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다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건가? 어른이 되는 건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이 초기 3부작 이후 줄기차게 하는 말이다.


우선, 찾는 건 언제나 거기 없다. 이쯤 되면 찾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꿈을 이루지 못해도 그 과정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 생각 따윈 도덕책에나 줘버려라. 그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각이 아니다. 보람 따윈 됐고 그냥 살아. 모험 전에도 인생이었고 모험 뒤에도 인생이야. 모험은 그저 나중에 돌아보면서 안주거리에 불과한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말한다.

그의 소설에 불쑥 등장하는 모험, 사람도 동물도 아닌 이상한 존재,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공간,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는 인물, 현실을 사는 지상 위의 이들은 알지 못하는 지하 저 밑의 세계들. 그 모든 인물, 캐릭터, 공간, 사건들은 사는 동안 겪은 “이상한 경험”일뿐이다. 과거의 역사가 내 안에 있고 오늘의 사건이 나를 통해 수행되며 그 사건 이후에도 미래는 이어진다. 주체는 그저 살아낼 뿐이다.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을 만끽하며, 어제와 닮은 듯하지만 미세한 차이를 만드는 오늘을 누리며, 두려움 없이 잠든 뒤 맞은 다른 오늘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그저 살뿐이다.


다시, 새 오늘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을 수도,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 엄청난 사건일 수도 있고 아무런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심지어 걸린 판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사건의 크기도 미처 감지하지 못한 채 산다. 최근 인생에 큰 변화를 겪으며 새삼 그걸 깨닫고 있다. 내가 십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그래서 그 책이 집에 아직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을 정도인 그 책이, 며칠 전에 알게 된 한 여고생에게 아주 중요한 책이 되어 그 소녀의 손에 넘겨졌다. 그 책의 가치 전환처럼 내 삶 또한 요 몇 주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흔한 말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말이다.


내려갈 마음도 없지만 설령 그럴 마음이 있다 해도 그 방법은 없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찾아야 한다면 찾으러 가야 하고 올라탔다면 호랑이가 멈출 때까지 달려갈 뿐이다.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다. 그저 그 호랑이의 등을 만끽할 뿐이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매년 그렇게 많이 읽어낸 책이 무슨 소용이 있나, 나 스스로도 궁금할 때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 책들이 새로운 가치를 입게 됐다. “양”이든 “호랑이”든 원래 그렇게 가치의 전환은 느닷없이 이뤄진다. 찾으러 갈 텐가, 올라탈 텐가. 난 지금 모험 중이다.


사족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3부작 중 하나다. 다른 두 작품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이다. 등장인물이 같고 시대 배경도 몇 년 사이다. 소설이 쓰인 건 80년대 초중반이나 정작 이야기는 70년대가 배경인 것이다. 이 또한 이 어긋남이 시기 소설들의 의미를 달리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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