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다 - 자크 데리다

동해선에 읽은 책 155

by 최영훈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 속죄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해야 하고, 따라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 형식적으로 비어 있고 말라 있지만 집요하게 까다로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포리아를 ‘한 번 이상’ 검토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P.35


*아포리아(aporia) : 하나의 명제에 대해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그 진실성을 확립하기 어려운 상태.


우리 잠시, 그 어려운 해체의 데리다는 잠시 잊자. 그라마톨로지의 데리다도 잠시 잊자. 대신 이 책이 원고로 사용됐던, 데리다가 용서에 대해 강연했던 세기말의 사건들을 잠시 떠올리자. 제노사이드라는 말을 우리 모두에게 각인시켰던 보스니아 내전은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일어났으며 르완다의 학살은 1994년에 일어났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국 전쟁 직후 그 불꽃이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나 끝났다. 그 앞에는 한국 전쟁이 있었고, 그 앞에는 2차 세계대전이 있었으며 이때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로힝야족 사태는 불과 십여 년 전에 있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4.3의 제주, 5.18의 광주는 불과 지난 세기에 있었던, 우리 역사의 상처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나열하자만 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뉴스에 보도되지 않았고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았던 사건들까지 감안하면 권력과 폭력에, 그리고 민족의 이름과 종교의 이름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명단은 대지를 덮고도 남을 것이다.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결국, 우리는 용서의 가능성은 물을 수밖에 없다. 데리다가 유대인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가 인용한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또한 유대인이었음을. 이들의 입장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 사건은 용서가 성립될 수 있는가? 우선, 용서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요청”되어야만 한다. 죄지은 사람이 피해자에게 요청하고 간청해야 한다. 이것이 첫째 조건이다.


요청되었다면 용서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용서의 성립은 결국 피해자에게 있다. 그 받아들임을 통해 겨우 용서의 가능성이 싹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아니 여전히 불가능한 용서가 있다. 피해 당사자가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홀로코스트처럼,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사건들처럼, 베트남과 미얀마와 르완다와 보스니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처럼 피해가 곧 죽음이었으며 생존했다 하더라도 질병과 노환으로 이미 피해자들이 죽었다면 가해자는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하는가.


여기서 시효 성립의 불가능성이 발생한다. 용서는 요청의 수락과 피해자의 공백 속에서 공회전하면서 그 시효를 역사 내내 끌고 간다. 용서가 거듭, 그러나 조용히, 대를 이어가면서 요청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여기에 또 하나, 회복불가능성이 존재한다. 용서를 요청하고 용서를 한다고 해서 사라진 사람들이, 부서진 건물들이, 짓밟힌 존엄이 회복되지 않는다.


장 미켈레비치가 독일 청년의 사죄 편지를 받고 용서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그 회복불가능성의 극복의 불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자신은 도저히 그 불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다음 세대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신과 권력은 이 회복불가능성을 극복하려 애써 왔다. 벌을 내리고 처벌을 했으며 신 앞에서 화해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건 용서의 불가능성을 더 독보이게 할 뿐이다.


죄인과 타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이 불가능성 앞에서, 이 시효의 만료 없음 앞에서, 이 회복불가능성과 마주하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돌아보게 된다. 내가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 지은 그 모든 죄의 용서는 어찌해야 하나. 비겁하게 고해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 지구 어딘가,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가 그 회복불가능한 인생의 구멍을 매일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교회와 성당과 절로 가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업보다. 원죄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은 여기서 다시 고개를 든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타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용서를 요청할 상대가 없어서, 그 요청을 거절당해서 내 죄가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떠돌 때, 그 맴도는 죄의 기운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등에 업고 타자에게 죄인의 자세로 나가는 것이다. 그도 누군가에게 죄인임을 알고 같은 운명을 등에 진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기독교의 원죄론은, 불교의 업보론은 그렇게 절반은 맞은 채 우리 삶을 관통한다. 그렇다. 절반뿐이다. 영화 <밀양>을 떠올려 보라. 유괴범이 하나님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그 교만함을 떠올려 보라. 손에 묻은 피는 씻을 수 있어도 죄는 남는다.


다시, 저 인용문을 생각해 보자. 사소한 것의 사과가 아니다. 어제 한 부부싸움의 사죄가 아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사죄이며, 용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용서의 가능성의 사유다. 우린 그 앞에서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 불가능성은 떠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남은 날들이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인간다움일 것이다. 사람다움일 것이다. 잊지 말고 살아가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 역사에, 심지어 미래에 도래할 세대에게 죄인이었고 죄인이며 죄인일 수도 있다는, 살아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민감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조건 중 하나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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