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무라카미 하루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156

by 최영훈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저 친구를 당해낼 재간이 없거든. 같은 술을 넣고, 저 남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시간 동안 셰이커를 흔들어도 완성된 칵테일의 맛은 다르단 말이야.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건 재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거지. 예술과 마찬가지야. 거기에는 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소중히 대해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거야. 높은 보수를 주는 거지. ",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P.162


새로 둥지를 튼 곳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원생이면 누구나 편하게 들어와서 공부하는 곳이다. 그곳의 한쪽 벽에 잔뜩 책이 꽂혀 있다. 어디를 가든 책이 많이 꽂혀 있는 곳이라면 그 면모를 샅샅이 보고 기억해 두려 한다. 때문에 갈 때마다 서가를 살피다 이 책을 발견했다. 거기에 꽂혀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중 유일하게 안 읽은 소설이다. 에세이로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3부작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이다. 이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환상적인 소설이 나왔고, 그 뒤를 이어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이, 이어서 <댄스, 댄스, 댄스>, 이어서 이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 나왔다. 그의 장편 소설 목록을 새삼 보면서 깨달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임을 자처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그의 장편 소설 중 안 읽은 소설은 이제 <댄스, 댄스, 댄스>와 <스푸트니크의 연인> 뿐이라는 것. 단편집도 많이 읽었고 에세이는 거의 다 읽었으니, 흠... 팬임을 자처해야 하나.


한심한 남자 주인공들

자, 각설하고 우선은 이 초창기 소설을 안 읽은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도 인정하듯, 그야말로 각을 잡고 쓴 연애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런 사소한 이유로 난 이 소설을 읽지 않고 있었다. 아마 저 작은 도서관에 이 책이 꽂혀 있지 않았다면 꽤 오랫동안 읽지 않고 지냈을 지도.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정말 그렇고 그런 연애소설인지, 안 읽은 사람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 연애 소설이다. 그런데 아주 묘한 연애 소설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건조한 버전 같기도 하고, <노르웨이의 숲>의 어른 버전 같기도 하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대체로 한심하다. 대학생인 주제에 수업을 거의 안 나가면서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책과 재즈에 빠져 있다. 하는 운동이라곤 수영 뿐이고 유부녀와 불륜에 빠지거나 자기 애인의 사촌 언니와 이상한 관계에 빠지기도 한다. 직업도 그럭저럭 괜찮고 결혼까지 한 삼십 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이혼당했거나 당할 위기에 처해 있고, 그 상황에서도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는다. 고양이를 찾다가 우물에 빠지질 않나,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질 않나. 엄청 영웅적이지도 않고 스펙도 없고 스킬도 없다. 매력 있는 한심한 남자다. 그런데 여자들이 좋아한다. 지바 마사야의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문화적 자본이 가득 차 있는 한심한 남자여서일까.


한심한 남자의 현실적 연애담?

이 소설은 이 한심한 남자의 현실적 이야기다. 내가 읽은 그의 소설 중 가장 현실적인 장편쯤 되려나. <양을 쫓는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이상한 의뢰나 이상한 세계로 가지도 않고 초기 3부작처럼 마냥 젊은 시절의 추억만 쫓지도 않는다. 물론 약간 특이한 주인공도 나오고 지루한 직장에 다니다 여자 하나 잘 만나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전개도 있지만, 대체로 80년대의 일본이라면, 재능과 지능, 여기에 약간의 운만 따라줬다면 누렸을 법한 재산과 지위, 그리고 꾸렸을 법한 가정이 나온다. 정말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이고 전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그 현실 안에 존재하는 묘한 어긋남, 불안, 공허함과 공백을 다루고 있다. 열둘 살 때 헤어진 첫사랑은 그 현실에 없는 무엇, 현실에 공백을 만드는 무엇이자 공백 그 자체다. 사실 공백은 인식하기 전까진 공백이 아니다. 마음의 허함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지 그 허(虛)는 실체가 없기에 현실에선 좀체 명사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허를 메우는 존재, 그러니까 허를 만들었던, 공백을 만들었던 존재가 등장하면 그 허함은 일상을 흔든다. 내가 잃고 산 건 이거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손에 잡혔던 현실은 순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이다.


국경의 남쪽

노래 내용을 모르고 듣는 팝송은 제3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제목의 뜻만 겨우 알고, 막연히 그 내용을 추측하게 되면 당연하게도 노래의 의미는 더 풍성해진다. 나중에 커서, 노래의 내용을 알게 되면 그 아우라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 노래, 그저 멕시코에 관한 노래였다. 모르고 들을 땐, 냇 킹 콜의 목소리로 들을 땐, 열두 살의 소녀와 함께 들을 땐, 그 남쪽에 뭔가 부드럽고 폭신하게 있는 줄 알았다. 그걸 그리워하는 노래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냥 그저 그런 가사였다.


태양의 서쪽

히스테리아시베리아나.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린다는 정신병이다. 눈에 보이는 건 평야뿐이다. 지평선 위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시계도 필요 없다. 해가 뜨면 밭을 갈고, 해가 지면 잔다. 반복이다. 그러다 미친다. 갑자기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걷는다.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행보의 끝도 없다. 멈출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거기 아무것도 없다.


현실

현실은 그렇다. 원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인용문을 다시 보자. 레시피를 지키고 방법을 지켜도 차이가 발생한다. 의미를 만드는 건 물(物) 자체가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의 온도, 마음, 작은 전율들, 멈춤들, 진동들. 그것들이 A와 B가 만든 동일한 칵테일의 차이를 만든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 한심한 남자, 하지메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니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 사람이 운영하는 두 개의 바는 사람들에게 제3의 공간을 제공한다. 맘만 먹으면, 돈만 있다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이고 꾸밀 수 있는 공간이지만 하지메는 그것들을 절묘하게 조합하고 여기에 썩 괜찮은 재즈 트리오와 차이를 만드는 바텐더를 더하여 공중 정원과 같은 “차이를 발생시키는 공간”, “의미를 생산하는 공간”을 만든다.


정상적인 환상

어린 시절, 한쪽 다리를 절었던 소녀 시마모토는 수술하여 “정상”적으로 보이는 다리를 한 채 삼십 대 중반에 나타난다. 묘하게도 그녀의 차이를 만들었던 결함이 사라진 후, 그녀는 뭔가를 상실한 채 하지메 앞에 나타난다. “완벽”해 보이는 신체를 가졌지만 더 이상 “완벽”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린, 일상이라는 “중간”을 더 이상 살아낼 수 없는 “일상적 존재”로 살아갈 수 없는 극단적 존재, 그래서 그 중간의 공백을 메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존재, 스스로 말했듯이 노동을 통해 뭔가를 손에 쥐어 본 적 없는 존재, 물(物) 자체가 될 수 없는 비인격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그걸, 허상(虛像), 환상(幻想)이자 환상(幻像)이라고 부른다. 어른은, 그런 것에 속지 않는다. 한심한 어른, 한심한 남자만 흔들릴 뿐이다.


소설은 가족 중 누군가의 손이 남자의 등에 닿는 것으로 끝난다. 두 딸 중 하나일지, 아니면 아내일지, 알 수 없다. 하지메가 더 이상 그 여자, 시마모토의 촉감을 떠오르지 못하게 됐을 때, 환상이 현실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의미는 여기 있다. 호미로 퍼 올린 흙더미 안에, 턴테이블에서 돌아가는 LP 위에, 아빠가 깨우러 오길 기다리며 자기 방에 잠들어 있는 두 딸의 어깨 위에, 삶이, 그리고 삶의 의미가 있다. 실체를 가진 채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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