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의 철학 - 지바 마사야

동해선에서 읽은 책 157

by 최영훈

우선 사족부터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행간을 읽으면 불온한 책이 있다. 내용도, 얼핏 보면, 아니 심지어 정독을 해도 무난해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엄청 불온한 메시지가 숨겨진 책이 있다. 지바 마사야의 이 책, <센스의 철학>이 정확히 그런 책이다.


뭐, 몇 번이나 말했지만, 혹시나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재차 말하면,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 아즈마 히로키는 애정하고 있는 일본 학자들이다. 마치 한국의 신형철과 서동욱 같은 느낌이랄까. 나이로는 다들 나와 동년배여서 이래저래 통하는 것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여하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함의 이유를 부연하자면 우선은 공부하고 좋아하는 학자의 궤적이 비슷하다. 게다가 소비한 대중문화라고나 할까, 그 콘텐츠의 양과 질도 유사하다. 그러다 보니 저쪽에서 쿵하면 이쪽에서 자연스럽게 짝을 하게 된다.


이 중, 지바 마사야의 가장 의뭉스러운 사내다. 사사키 아타루는 엄청 바쁘게 산다. 비즈니스맨과 활동가를 한 데 모아놨다고 보면 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덕후의 느낌이다. 그가 쓴 책도 그렇지만 활동 자체도, 뭐랄까, 외골수 느낌이 난다. 반면 지바 마사야는 무난하다. 번역된 그의 책들은 <너무 움직이지 마라>를 제외하면 수월하게 읽힌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앞에 내놓았던 두 책, <공부의 철학>과 <현대사상입문>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도 뭔가 불온한 것을 숨겨놓았을 것이 분명한데, 그 쉬우면서도 친절한 문장에 속아 못 읽어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화자본이 있다는 건 많은 것을 접하고 다양하게 먹는다는 것, 즉 넉넉한 양을 소환한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빅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넉넉한 양을 소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단력이 몸에 배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것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인터넷에 있는 엄청난 양의 문장이나 이미지를 ‘먹이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생성’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P.23.


센스? 혹은 삶의 문제

서론 부분, 센스에 대해 정의를 내리다 슬쩍 저런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센스의 유무 문제는 결국 문화자본의 빈곤 문제임을, 즉 센스가 없다는 건 문화자본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임을 에둘러 말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이 책은 일반적인 예술론이 아니다.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이 AI 시대에 정작 “예술적”으로 살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는, 일종의 지바 마사야의 돌려 까기다. 응. AI로 멋있는 것 좀 만든다고 예술가 되는 거 아냐. 센스 있게 사는 거 아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결론부터 말하면 지바 마사야는 들뢰즈를 숨긴 채 들뢰즈의 이론으로 삶을 얘기하고 있다. 리듬, 반복, 차이 등등의 단어들은 들뢰즈를 알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단어다. 지바 마사야는 이 단어들로 결국엔 센스, 결국엔 개성, 결국엔 나다운 삶을 사는 법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답게 들뢰즈의 이론이라고 간판을 내걸지 않은 채 슬쩍 가져와서 말이다. 게다가 서스펜스와 영화적 편집, 현대 미술, 뒤이어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까지 가져와 말하다 보니 들뢰즈의 간판은 더 안 보인다. 음흉한 사람.


센스는 일종의 차이다. 차이는 또, 일종의 불안이고, 불안은 우리에게 - 지바 마사야가 그랬듯 라캉의 이론을 빌려와 말하면 - “향락”을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 충동이라고 했다. 이 쾌감이라면 쾌감,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인 “향락”은 안온함과 만족에서 오는 “쾌락”과 다르다. 향락은 일종의 통제할 수 없는데서 오는 쾌감이다. 놀이기구를 타거나 텀블링, 백플립을 할 때 허공에 잠시 머무는 순간, 지상에 착지하기 전의 그 짧은, 찰나의 통제 불가능한 순간, 그 순간이 선사하는 “유사 죽음”이자 짧디 짧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이 모험은 순식간에 끝나고, 다시 “착”하고 지상에 발을 디딘다. 일상이다.


“어떤 박력을 동반하여 센스를 뚫고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개성으로서의 반복인데, 그것은 ‘개성적인 템플릿 혹은 틀’과 같은 게 아닐까. 독창성(originality)이란 그 사람이 어떻게 전형적인 것과 관계를 맺고 또 거리를 두었느냐에 대한 독창성을 말한다.”, P. 211.


센스, 혹은 다른 삶을 만드는 법

지바 마사야가 후반부에 말하듯이 우리는 전형과 일탈, 안온함과 허공의 서스펜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산다. 우리가 고유의 감각을 갖게 되는 것도 결국엔 이 갈팡질팡의 반복 속에서 얻어진다. 나에게 존재의 소속감을 선사하는 전형(典型), 즉 Prototype에 발을 딛고 살면서 그로부터 탈출과 회귀를 반복하며 내 “센스”, 나만의 삶의 “감각”과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센스는 모두가 같은 리듬으로 살 때, 심지어 나 또한 그 리듬으로 살 때, 가끔은 살짝 다른 리듬, 혹은 변주를 가함으로써 발생한다. 또는 지바 마사야가 얘기했듯이 의미와 줄거리, 맥락, 메시지의 강박에서 잠시 벗어나 낯섦, 어긋남, 사물 그 자체, 현상 그 자체, 예술이 주는 놀람과 신선함, 그 자체를 의지적으로 반복하여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즉 돌아갈 전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탈이 정상과 대조되어 의미를 얻고, 리듬의 변박이 정박과 대조되어 의미를 얻듯이 말이다. 물론 지비 마사야는 이 토대를 만드는 법도 아주 친절하게, 맨 뒷부분에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술적 감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그 감각을 만들 수 있는 출발점이 있으니 너무 겁먹지 말라고 말해준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뭔가를.


“우선 나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부터 시작하는 접근법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의미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의미적인 중요성보다는 왠지 자기 몸에 남아서 있어서 ‘그러고 보니 나한테 그게 있었구나.’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든 음악이든 게임이든 뭐든 좋다. 그런 것들은 인간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방식,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 생활 속에서 다양한 행동을 느끼는 방식....... 등에 뜻밖에도 두루 관련되어 있다........ 어떤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다거나, 어쨌든 그 그림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뭔가 대사를 따라 하려고 한다든가 하는 이른바 지우고 싶은 흑역사까지 포함해서. 우선 그곳을 출발점으로 임시 고정해 두기로 하자.”, PP.219~220


또, 사족

이 부분을 읽다가, 지바 마사야의 권유에 따라 고개를 들어 생각해 본 순간 <카우보이 비밥>이 생각났다. 뒤이어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그리고 베이스...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뒤에 나온 것들은 의외로 <카우보이 비밥>으로 수렴된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여하간, 다들 센스가 없다는 평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아 이 책을 무심히 들었다면 얼른 내려놔라. 이 책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는 삶”, “일상에서 차이를 만드는 법”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다시 말하지만 센스는 차이 그 자체이니 말이다.


그러니 옷 잘 입는 센스라든가, 말 잘하는 센스를 알고 싶어 이 책을 골랐다면, 다시 말하지만 내려놔라. 그러나 좀 “다르게” 살고 싶다거나, 가끔은 “미쳐”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봐라. 들뢰즈의 이론이 그랬듯, 정상과 비정상, 일탈과 복귀, 그 반복 속에서 획득되는 차이를 누리는 자유를, 그 자유를 선사하는 차이의 가치를 알려주 테니 말이다. 아, 물론 그 방법도 살짝. <카우보이 비밥>의 OST를 들으며 라면을 먹기 딱 좋은 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