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동해선에서 읽은 책 160

by 최영훈

그 책들 중 한 권

다들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들이 한두 권씩 읽을 것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같은 작품 말이다. 나 또한 대학원 시절, 불쑥 이 작품들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출해서 읽었었다. 물론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아, 또 하나의 부류는 축약본이나 아동용을 완역본으로 착각하는 경우인데, 대표적인 작품이 <백경>과 <돈키호테>그리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작품 아닐까?


이 책도 그런 종류의 책이다. 과거, 논술 시험 초창기 때 예문으로 하도 많이 사용되어서 교재에도 많이 실렸다. 당시에 공부했던 이들은 결국 이 책을 “읽었다”라고 착각을 하며 서른을 넘기고, 마흔 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읽은 줄 알고 살았고.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읽어보니 읽지는 않았는데, 내용은 너무나 익숙하다. 심지어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배경까지.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대중문화까지

이 책을 포함한, 소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은 오래전에 나왔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멋진 신세계(1932)>이고 그 뒤를 이어 <1984(1949)>, 그리고 <기억 전달자(1993)>가 가장 최근작이다. 이 리스트에는 포함이 안 됐지만 디스토피아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화씨 451(1951)>과 <시계태엽 오렌지(1962)>의 출간 시기를 감안하면 디스토피아 문학은 20세기 내내 시기마다 굵직굵직한 작품들이 등장시켰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엔 로봇과 AI를 소재로 한, 디스토피아 문학의 새로운 줄기가 나오는데, 일본 작가 오쓰이치의 단편집 <Zoo(2006)>에 실린 <양지의 시>와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2022)>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문학작품은 대중문화, 특히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 <인랑(1999)>에서도 디스토피아 문학의 유산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타카(1997)>, <다크시티(1998)>, <트루먼 쇼(1998)>, <매트릭스(1999)>, <이퀼리브리엄(2002)>, <빌리지(2004)>, <아일랜드(2005)>등 수많은 영화에도 그 주제 의식이 전이 됐다. 심지어 <월 E(2008)>와 <주토피아(2016)>와 같은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미국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도 그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블레이드 러너(1982)>와 <엑스마키나(2016)>, <Her(2013)>와 같은 영화는 <작별인사>와 동일한 주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내게 이 책의 캐릭터와 배경, 내용의 전개가 익숙한 이유다.


원조의 위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놀랍도록 신선하다.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 시나리오처럼 중반부 이후 극적인 반전이 이뤄지면서 내용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중심에,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존이 있다. “문명화”되어 있지 않는 “사람” 그 자체인 주인공. 타자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상실의 고통을 오롯이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인간, 복제되지 않은, 생산되지 않은 단 한 사람.


결국, 이 소설은 이 “존”의 존재를 통해,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과 콘텐츠들이 그러하고 그러했듯,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다움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더 묵직하게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전반부까지 농담처럼 가볍게 소설을 전개시킨다. 주인공들의 이름을 공산주의 혁명가들과 당시에 막 등장한 대자본가들의 이름에서 따와 붙인 것도 그 가벼움의 요소였다. 나 또한 그 이름들을 읽으며 웃었으니까. 이런 이유로 전반부까지는 양 진영에 보내는 작가의 조롱과 냉소처럼 읽혔다. 그러나 후반부로 접어들면 인류 전체에 보내는 장엄한 질문임을 알 수 있다.


“행복이란 아주 귀찮은 주인이야. 타인의 행복은 더욱 그렇더군. 사람이 행복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지 않은 경우에는 진리보다도 더 섬기기 어려운 주인이야.”, P.348(문예출판사, 에디터스컬렉션 판본)


작가는 이 질문의 장엄함을 위해, 셰익스피어를 등장시킨다. 그 문명화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그의 전집을 읽은 존은 자신의 심정과 생각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빌려와 말한다. <화씨 451>, <이퀼리브리엄>처럼 분서(焚書)의 시대를 통과한 후 매뉴얼 외에는 다른 책이 존재하지 않는 “문명화” 된 사회에서 “야만”의 공간에서 온 존은 혼자 외롭게 문명의 언어로 사람다움을 항변한다. 약만 먹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곳에서 행복과 고통의 공존, 행복을 위해 삶을 밀고 나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당연시하는 존의 존재는 외계인과 같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더 길다. 사람다움의 조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존의 고립은 상품화된다. 이로 인해, 존은.......


고전엔 고전의 이유가 있다. 다시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