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61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P.11
동유럽의 공산국가 출신 작가가 쓴 소설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90년대 들어서, 체코슬로바키아(그때는 이렇게 이름이 길었다. 이후 분리독립 했다. 뭐, 엄밀히 말하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출생의 밀란 쿤데라의 소설 몇 권을 읽은 기억이 전부고, 러시아까지 범위를 넓혀도 톨스토이의 단편과 투르게네프의 단편 정도, 아, 카프카도 읽었으니, 의외로 많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의 면면을 봐서 알겠지만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들이다. 작가의 명성이 국적을 덮을 정도의 작가들이다. 그 뒤에 등장한 작가 중엔 그런 작가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냉전의 종식 이후 동유럽 작가들이 누려왔던 어떤 모종의 신비의 베일이 거두어져서인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참을 이 지역 작가들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마 이 소설도 선물을 받지 않았더라면 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검색하여 내용을 알았더라면 손도 안 댔을 것이고. 그 고독이 너무나 처절하여서. 그 고독이 너무나 와 닿아서.
이 소설은 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으로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4장과 5장, 그리고 8장을 제외하고 아래와 같은,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삼십오 년 동안 나는 폐지를 압축해 왔다.”
“삼십오 년 동안 나는 내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해 왔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일할 거라 생각했다.”
이 소설이 60년대 나왔고, 주인공 한탸가 전쟁 이야기를 종종 하는 걸 보면 최소한 그는 2차 세계 대전 전부터 이 일을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사랑했고, 평생 이 일을 하다가 압축기와 은퇴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일이 좋아서가 아니다. 압축기가 있는 지하 공간으로 떨어지는 온 도시의 종이 뭉치 안에 섞여 내려오는 책들 때문이다.
그의 삶은 고독하다. 아니, 그냥 제목이 그래서가 아니라, 정말 제목으로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고독”, 그 자체다. 그가 일하는 지하 공간처럼, 지독하게 반복되는 일상처럼,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책에 파묻혀 있는 그의 집처럼, 그리고 매일 수리터씩 들이붓는 맥주처럼, 그의 고독은 진하고 깊다. 타인의 손길, 온도가 아예 배제된, 절대적인 고독.
그의 고독은 자발적 선택이다. 그 지하는 유배지가 아니다. 그는 그 공간을, 그 직업을 벗어나려는 시도도, 꿈도 꾸지 않는다. 종이 쓰레기 더미 곳곳에서 발견하는 책들이 주는 기쁨을, 그 보석 같은 책을 집에 쌓아두는 행복을 은퇴할 때까지 누리기 위해, 그리하여 종국에는 책의 관에 들어가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그래서, 그의 비극은 공산당이 그의 보직을 바꾸면서 시작된다. 깨끗한 공장에서 하얀 종이를 만드는 보직으로 옮겨진 순간, 그의 비극이 임박한다. 그래서 그가 내린 선택은...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P.127.
이 말이 진리일까? 바닥까지 가본 적 없는 사람은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걸까? 그가 삼십오 년 간 머문 그 공간에서 만들어 온 그가 최상의 자신인 걸까? 아니면 그 공간이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에게 부여된 그 새로운 직장은 당이 그에게 준 선물 아닐까? 난 확답할 수 없다. 그는 그곳에서 행복해 보였다. 고독했으나, 그걸 숙명으로 받아들여 살아왔다. 무려 삼십오 년간을. 그 시끄러운 고독한 공간은 그에게 조용한 행복을 선사했는지도. 아주 고요한 평화, 고용한 행복, 그러나 철저히 소외된. 그의 그 압도적인 소외와 고독이 책을 덮은 뒤에도 “압축”되어 내게 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