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62
애들 덕분에 고전을 다시 읽고 있다. <데미안>을 언제 처음 읽었을까? 중학생 때? 당시 책을 좋아하던 애들 사이에서 헤르만 헤세가 유행이었다. 꼭 거쳐야 될 관문 같은 것이었다. 나도 친구들에게 빌려서 <데미안>을 비롯해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황야의 늑대> 등을 읽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내용이 기억에 남은 건 <크눌프> 뿐이었다. 내 착각이었다. <데미안>을 펼쳐 두세 장 읽자 나머지 내용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들어오듯 연이어 생각이 났다.
내용이야 다들 아니, 십 대 때 읽은 소설을 오십이 넘어 다시 읽을 때의 느낌을 전해보려 한다. 우선은, 그때, 그러니까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분명히 이 소설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이 짧은 소설-기껏해야 중편 정도 길이다. -안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우선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골고다 언덕의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명의 죄인, 야곱의 씨름과 그의 이름의 변화 등, 성경 속 주요 이야기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알고 있어야 그 전복(顚覆)과 이교도적 해석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더불어 압락사스라는 신으로 압축되어 표현되는, 인류가 가진 원형에 대한 약간의 지식도 있어야 한다. 헤르만 헤세가 칼 융과 친했다는 걸 감안하자. 그리고 칼 융의 책 중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심오한 책이 <인간과 상징>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선과 악, 여성성과 남성성, 육식동물의 포악함과 초식동물의 두려움이 공존한다는, 고대 종교, 혹은 미신과 설화에 담긴 인류 사고방식의 원형(原形)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으면 소설의 내용 전개를 따라가기가 수월해지고, 막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의 상징성이 더 명확해진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우리들? 오, 어쩌면 우리도 함께 멸망하겠지. 우리가 우리 같은 사람을 쳐죽일 수도 있지. 제발 그럼으로써 우리가 다 없어져 버리는 일만 없기를. 우리에게서 남는 것, 혹은 우리들 중에서 그 후에도 살아남는 자들 주위에 미래의 의지가 집결되겠지........ 이 유일하게 중요한 조류들을 위한 - 그런 건 물론 날마다 모습이 다를 수 있겠지만 - 공간이 생기게 될 거야. 오늘날의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나면 말이야.”, PP.183-184(민음사 판본)
물론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에 내재되어 있던 초인 사상과 실존주의 사상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이 소설의 행간이 더 쉽게 읽힐 것이다. 심지어, 위에 인용한, 7장 <에바부인>에서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사에선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독일 국민이 처해 있던 심리적 공백 상태와 정치적 혼동과 혼란 상태, 그리고 각종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된 유럽의 혼란을 일거에 몰아낼 어떤 기운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한 느낌도 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두 괴물을 앞세웠던 전체주의라는 불온한 기운을.
이 소설이 나온 시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오해의 소지는 충분하다. 이 소설은 1919년에 출간됐다. 알다시피 1914년에서 1918년까지 1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패전국인 독일은 그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막대한 배상금 부과받았고, 영토(알자스-로렌 프랑스 반환 등)를 상실했으며 식민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군비 제한(육군 10만 명 이하, 징병제 폐지 등)이라는 수모까지 당해야 했다. 그야말로 경제적으로 빈곤했지만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졌던 시기에 이 소설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을 그저 단순한 성장 소설로 읽을 수는 없다. 곡해해서 읽으려 들면 충분히 하나의 프로파간다로 읽을 수도 있고, 더 곡해해서 읽으면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위험한 혁명의 교시(敎示)로도 읽힐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곳곳의 술집에서 웅성대던 대학생들을 비웃던 싱클레어의 목소리를, 일본 사람을 때려눕혔던 데미안의 이야기를,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던 데미안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더 그렇게 읽을 여지가 있다.
물론, 헤세의 주인공들은 다들 세상의 밖에 있다. 막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지니고 있는 카인의 상징이, 나그네였던 크눌프의 이야기가, <황야의 늑대>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누아르적 주인공을 닮은 해리 할러의 삶도, 심지어 부처도, 세상의 시류, 그 밖에 있다. 선과 악의 논쟁, 참과 거짓의 옥신각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금세 잊힐 이데올로기들의 하찮은 투쟁, 이 모든 것들의 밖에 있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그 밖을 택한 사람의 이야기, 그리하여 그 안의 사람들에겐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 사람의 이야기, 결국엔 차라투스트라, 초인을 닮은, 실존의 무게를 견디며 “나”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오십이 넘어 다시 읽은 <데미안>은 그렇게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