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날의 돌림노래 - 사사키 아타루

동해선에서 읽은 책 163

by 최영훈

책을 읽다 보면 이런 감정이 들 때가 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감정. 이런 감정은 사실 흔하게 드는 감정이다. 그런데 사사키 아타루의 아날렉타 시리즈를 읽다 보면 ‘나도 이런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물론 이런 대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많이 알아야 하고 마주한 패널도 그리해야 하며, 관객도 제법 있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매번, 그의 이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이런 부러움이 말릴 새도 없이 생겨버리곤 한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연습이란 기도 같은 것이야.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쯤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죠. 그렇게 연습해서 높은 수준에 달해야 비로소 즉흥이 가능합니다., P.69


자유로움을 위한 연습

<야전과 영원>을 읽을 때, 압도를 당했었다. 내 또래 학자가 이렇게 사유의 고삐를 꽉 붙잡고 정교한 교향곡을 작곡하듯이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썼다는 사실에, 그 분량과 내용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눈을 붙잡아두는 능력에 놀랐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뒤를 이어 나온, 일종의 <야전과 영원>의 해설서 역할을 하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도 읽었고 지치지도 않고 기고한 글들과 각종 대담을 모은 아날렉타 시리즈도 차례로 읽어 갔다.


그것들을 읽을 때마다 무자비한 연습을 통해 얻어진 완벽에 가까운 기예 능력을 가진 곡예사의 자유로움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자재로 쓰는 손흥민의 양발처럼, 김연아의 연아바우어처럼, 전성기 시절 커쇼의 커브처럼, 이정효 감독의 축구 전술처럼, 수 없이 반복되는 연습 뒤에 얻어지는 자유로운 표현이 그의 글과 말에 있었다. 내가 부러워했던 건, 그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의 연습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랄하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 애정이 넘친다. 글과 말에 대해, 문학에 대해, 철학에 대해, 책 그 자체 대해. 더 나아가 음악을 포함한 예술에 대해서도. 이 두 번째 시리즈의 중간쯤엔, 일본 힙합 음악의 역사를 주제로 한 대담이 있다. 언급되는 뮤지션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힙합의 본질, 미국 하위문화와의 관계, 일본어로 랩을 하는 것의 문제, 일본에서 힙합을 비롯한 흑인 음악이 하나의 하위문화로 수용되고 정착되는 과정, 랩의 플로우 및 라임과 일본어의 각운과 압운의 관계, 랩과 일본의 정형시의 전통과의 관계에 대한 그야말로 물 흐르는 듯 한 논의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후루이 : ‘알지 못할 정도로 읽는’ 독서방식이 우리의 청년 시절, 특히 이른바 문학청년들에게는 일반적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니까 읽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점점 세상이 변한 덕분인지, 교육이 변한 덕분인지, 거꾸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재미없다고 말입니다.
사사키 :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몇 번이든 만나고 싶고, 몇 번이든 다시 읽고 싶은 것입니다. , PP.194-195(작가 후루이 요시키치와의 대담 중에서)


독서와 책에 대한 자세

이 시기, 일본에서는 <초역 ; 니체의 말>이 유행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쇼펜하우어가 유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SNS에서 우연히 이런 현상을 다룬 글을 본 적이 있다. 한 작가는 “요즘 서점은 ‘철학’이란 이름이 붙은 매대가 가장 징그럽다. 마치 쇼펜하우어와 몇몇 이들의 팬클럽이 마련한 매대인 것”같다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까진 그럭저럭 그러려니 했는데, <마흔에 읽는 비트겐슈타인>에선 솔직히....


쉬운 것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 쉬운 것을 찾는 것이다. 아니, 재미를 위해 쉽기로 작정한 책들만 팔리는 것이다. 초역(超譯)은 이 책의 각주를 그대로 옮겨 설명하면 “의역에서 더 나아가 번역문의 정확성을 희생시키더라도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을 우선시하는 번역”이다. <초역- 니체의 말>을 “창작 번역”한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이후 그 유명한 <초역-붓다의 말>도 “창작 번역”해 세상에 내놨다. 그러나 사사키 아타루가 어느 책에선가 말했듯이 어려운 건 어려운 채로 놔둬야 한다. 읽었다는 착각을 주는 것보다 읽어도 모르겠지만 끝까지 읽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그런 열망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책과 나 자신에 대한 예의다.


앞서, <데미안>에 대해 말한 것처럼, 지금 이 소설을 읽는 청소년 중 상당수는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초역된 주니어용의 <데미안>을 읽으며 그저 그런 <완득이>나 <아몬드>류의 성장 소설로 수용될 것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데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또 그런대로 놔두고 묵묵히 읽어나가는 것이 좋다. 그 이유, 인용한다.


“그럼에도 책은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책은 하나의 고난이자 시련이기 때문에, 구제가 필요하지 않은 환희의 근원이기 때문에, 책은 열광의 씨앗이자 과실이기 때문에....... 책 읽기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강행군을 마치고 그늘에서 벌컥벌컥 마시는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다.”pp.214-215


책에 대한 상찬과 가치 없는 책에 대한 분노가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한 해를 정리한다. 믿거나 말거나, 신년 독서 목표는 늘 100권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절반쯤 읽는다. 올해는 정말 딱 절반을 읽었다. 학원의 학생들 덕분이다. 여름날의 마음고생이 없었다면 다섯 권쯤은 더 읽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지만, 이미 지난여름이다.


책이 좋아서 읽은 세월이 대략 이십몇 년이다. 본격적으로 인문학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헤아리면 20년이 안 된다. 왜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저 최근에서야 조금 마음의 평화를 겨우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읽지 않으면 그 평화가 없어질지 모르기에, 앞으로도 읽어나가려 한다. 매해 나름의 프로젝트를 정해놓고 읽는다. 부질없지만, 그래도 세워 놓는다. 올해는 어째, 좀 더 읽을 수도, 프로젝트 성과가 있을지도....... 늘 하던 기대를 또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