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서 읽은 책 01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부풀리며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부풀다 못해 열기가 정수리로 올라와 시선에 열기를 담아 마지막 장, 마지막 활자까지 태우듯이 읽었던 적이 있다. 삼십 대, 어쩌면 사십 대에 들어서도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렇게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고 대충 생각나는 핑계도 여러 가지다. 그 이유와 핑계들의 그럴듯함도 저 깨달음을 밀어내지 못하여 나는 그들처럼 쓰겠다는 욕망을 내려놨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26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P. 27
이런 문장을 두 페이지 연이어, 서로 다른 영화를 다룬 글의 끝과 시작에 턱 하니 배치해 버리는 사람의 책을 읽으며 ‘이런 글을 써내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치기 어리지 않다. 오십이 넘어 겨우 철이 좀 든 것이리라. 르브론 제임스의 덩크 슛을 보면서 그처럼 덩크 슛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처럼, 그런 엄두를 아예 내지도 않는 것처럼, 어떤 글은 시도의 영역 밖에 있다. 그리하여 결국엔 내가 쓸 수 있는 글, 나다운 글을, 그저 써내자고 스스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다독이며 돌아설 수밖에 없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문학평론가인 그가 <씨네 21>의 의뢰를 받아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에 관한 글을 썼다. 그 스스로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몰라서 그가 쓴 글은 영화 평론이 아니라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 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 물음은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썼다.
그가 쓰기 위해 본 영화들 중 대부분은 나도 봤거나 알고 있는 영화다. 그래서 어떤 글에는 더 깊이 공감했다. <러스트 앤 본>을 보고 소환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의 몇 편의 영화, 제프 니컬스 감독의 <테이크 셀터>, 스티브 맥퀸 감독의 <셰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등이 그런 영화다. 그가 서두에서 밝힌 대로, 그는 영화 비평이 아닌 영화에 담긴 이야기에 주목하여 글을 썼다. 이야기에 담긴 윤리와 철학, 담론을 열네 개의 단락 안에 촘촘히 담아냈다. 때로는 그 영화 하나만으로, 때로는 그 영화를 닮은 두세 개의 영화를 더 불러내어, 때로는 그 영화가 있기 전 그 영화의 서사의 기원이 되는 문학 작품을 불러내어 글을 풀어갔다.
그가 나와 비슷한 또래여서인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슷해서인지, 어느 영화를 다룬 어떤 글은 내가 그 영화들을 보고 쓴 글의 맥락과 비슷하여 내심 흐뭇하기도 했다(생각이 비슷했다는 것이지 글의 수준이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해마시라.). 특히 <셰임>과 <설국열차>에 관한 글은 더욱. <설국열차>의 경우, 불과 일주일 전 학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디스토피아 문학에 영향을 받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내용과 거의 흡사했다. 저자가 논의의 전개를 위해 마르크스와 발터 벤야민의 서로 다른 혁명에 대한 생각을 가져왔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래비티>를 다룬 글을 보면서도 많은 공감을 했다. 삶의 부조리를 견디며, 그러니까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을 굳이 유지해야만 하는 그 부조리, 살아야 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끝끝내 찾아내어 살아내야만 하는 부조리, 설령 못 찾았다 하더라도 살아 있기에 살아가야만 하는 부조리, 그 부조리함을 겨우 견디고 건너온 뒤 가까스로 찾은 평온의 의미, 내가 찾은 그 의미는 그의 글에 담긴 논지와 닮았다.
종이가 두꺼워 책이 두꺼울 뿐, 페이지는 250페이지도 안 된다. <몰락의 에티카>를 제외하면 불필요하게 자신의 공부를 앞세우지 않는 그이기에 이 책에 담긴 글 또한 담담히 읽힌다. 이론과 철학이 아니라 생각이 그의 꼼꼼하게 배치된 글에 담겨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의 말미, 부록처럼 실린 <해리포터>의 등장인물, 스네이프에 바친 글은 <해리포터> 덕후인 중학생 딸도 읽어냈다. 딸이 그 글을 막 읽어나가다 내게 물었다. “아빠, 가룟 유다가 누구야?”, 잠시 설명해 줬다. 이후, 조용히 다 읽은 후 한마디 했다. “야, 이 분 뭘 좀 아시네.”
그렇다. 지난 몇 년간 <해리포터> 덕후로 살아온 십 대 소녀가 읽어내고 있는 인물과 사건의 행간과 배후, 거기에 담긴 의미를 마흔이 넘은, 이 글을 쓰기 위해 보름동안 벼락치기하여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 한 평론가가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아감벤이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그 유다를 소환 해서 말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도, 문학을 좋아하는 이도 사랑할 책이리라. 이런 그의 책을 표지가 촌스럽다는 이유로, 제목만으로는 그저 사랑 타령만 하는 에세이라 짐작되어서, 읽는 것을 미뤘던 과거의 나를 꾸짖으며, 올해의 첫 책, 지난 연말부터 나의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며 새해의 문을 열어준 책으로 소개한다.
올해부터 글의 대문을 바꿔, 몸을 담고 있는 학원의 이름을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