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 황선미

의문에서 읽은 책 02

by 최영훈

내 수업을 듣는 아이 중 가장 어린 녀석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준이다. 명지에서 오는데, 서울로 치면 강북 저 위에서 강남 저 아래까지 오는 것과 같다. 부모의 열성도 열성이지만 그걸 따라주는 소년의 인내도 대단하다.


그 친구와 처음 읽고 생각을 나누기 시작한 책이 <기억 전달자>인데, 두 주 후,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했더니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선생님, 이 책 <기억 전달자>란 약간 비슷해요.”한다. 다음에 더 길게 얘기해 보자고 약속하여 나도 읽어봤다. 읽는 데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갱년기여서일까, 몇 번 울컥했다.


“잎싹은 아카시아 잎사귀가 부러워서 ‘잎싹’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 지어 가졌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잎사귀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분이 묘했다. 비밀을 간직한 느낌이었다.”, P.13


이름

이름은 부여되는 것이다. 타자인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로부터 불리어지는 것이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가지는 것은, 그래서 존재의 위상을 위태롭게 한다. 아니, 어쩌면 위태로운 존재의 위상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라도 이름을 지어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잎싹’의 경우엔 후자이리라.


군대, 학교, 사회, 업계 등에서 부여하는 직위, 직책, 별명, 아호(雅號)도 대체로 남이 부여하고 불러준다. 그 부름은,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면, 사람에게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줬다는 의미다. 동물 종의 차원의 호칭인 “인간”을 넘어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타자의 불러줌이 필요하다.


그 불러줄 이름이 없을 때, 우리의 운명은 태어난 곳에서 멈춰버린다. 더 이상 불리어주지 않는 이름과 명칭은 그 존재와 함께 사라진다. 부모가 죽은 자식은 더 이상 누군가의 딸과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연인과 헤어진 이가 더 이상 “내 사랑”이라 불리 울 수 없는 것처럼, 자식이 죽은 부모가 더 이상 엄마와 아빠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름 안에 부름 받는 이의 무게와 불러주는 이의 무게가 공존한다. 우린 부름 받기 위해, 불러주기 위해 끝내 살아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된 거야. 우리는 다르게 생겨서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어. 나는 너를 존경해.”, P.81


다름

이름은 다름을 요구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이라도 다른 존재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말에 그 뜻이 들어 있다. 작년 말, 학원의 중학생과 대화를 하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녀석은 소문에 의하면 IQ가 150이 넘는데,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다. 학원에 나온 지 제법 됐는데, 어느 선생님도 그 녀석이 검은 마스크를 벗은 걸 본 적이 없다. 그 녀석이, 사랑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요지는 이랬다. 사랑으로 인해 내 일상이, 이해의 간극이 너무 넓게 흔들리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기의 상식과 경험, 그 밖의 무엇이, 그런 존재가 자기를 흔드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과 사람을 말이다.


내가 답했다. 이해(理解)란 이성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그 이라는 한자가 다스릴 이자다. 즉 타자와 사물을 너에 이성의 틀 안으로 당겨와 네가 받아들이기 편하게 재단하여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랑을 이해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관용처럼, 아량처럼 느껴지나 실은 제법 난폭하고 교만한 생각이다. 그러니 혹여 사랑이 찾아오거들랑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사랑하도록 노력해라.


“울고 싶은 감정이 목까지 차올라 온몸이 뻣뻣해졌다. 마지막으로 주름진 알을 낳던 날처럼 가슴이 긁히듯이 아팠다. 슬픔이 심하면 몸까지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P.94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 소망을 간직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마당을 나온 건 잘한 일이야. 철망은 말할 것도 없고.”, P.123


고름

사는 동안 고름이 흐른다. 살아온 날만큼 고름이 차서 흐른다. “유년기의 상처는 목구멍에 박힌 칼과 같아서 잊히지 않는다.”는 <그을린 사랑>의 대사와 “기둥에 칼자국”이 났다는 <데미안>의 독백에도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상처는 언제나 미봉(彌縫) 된다.


상처는 희망을 갖고 사는 동안 계속 늘어나고, 미봉된 상처는 꿈이 있는 한 계속 벌어진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산 자만이 상처를 입고 꿈이 있는 자만이 지난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본다. 삶은, 그리고 희망과 꿈은 원하는 대로 될 때보다 배신할 때가 더 많기에 우리는 배신을 각오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걸 아는 자만이 눈물을 삼키며 잠들 수 있는지도 모른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는 라캉의 말에도 어쩌면 이 희망과 배신의 역설이 담겨 있는지도.


“어쩌면 앞으로 이런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잎싹은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야만 했다. 간직할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으니까.”, P. 162


주름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차용한 들뢰즈의 생각을 인용하면, 우리의 삶은 주름을 닮은 잠재태다. 펼쳐진 것만 확인할 수 있으며 펼쳐지지 못한 것은 가능 세계에서 웅크리고 있다. 그야말로 가보지 못한 길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힘껏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낸 사람에게 기억은 옷장 속의 옷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에게조차 낯선 옷 몇 벌 정도는 옷장 구석에 숨죽이며 잠들어 있는 것처럼 기억 또한 그렇게 잠들어 있다. 그런 기억들은 종종 지금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주름이 진 기억을 애써 펴서 살핀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좋았던 날이 있었다. 사랑했던 순간이 있었다. 울었고 웃었던 날들이 있었다. 죽고 싶었던 날도, 다시 희망을 품었던 날도 있었다. 그 모든 기억의 주름을 손에 든 채 거울을 본다. 주름진 얼굴을 한 나를 본다.


얼굴에 주름이 질 때까지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맥주 한 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