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서 읽은 책 03
"누구든 자기 삶 앞에 멈춰 서서, 삶과 거리를 두고 삶의 의미를 묻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삶 자체이기에 우리는 삶과 거리를 둘 수 없고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없다. 삶의 파도가 칠 때 연안까지 밀려온 미역처럼 허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그저 빙글빙글 돌뿐이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요동치는 물속에서 잠시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공기주머니이다. 그래서 이것은 삶에 대한 책이 아니라 삶과 함께 있으려는 책이다.", 서동욱,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 P.8
“그런 사회에서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며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비참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죽은 아들과 내가 합작한 기도의 말이다.”, 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pp.8-9
이 책의 부제는 ‘삶의 무의미를 견디는 연습’이다. 공감한다. ‘견딘다.’는 말을 생각한다. 수동적이다. 부득이하다. 겨우 하는 짓이다. 그러나 위대한 말이다. 서동욱의 저 서문을 읽으면서 강상중의 서문을 떠올렸다. 강상중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썼을 때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직후였고 이어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원전 사고가 난 뒤였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죽은 아들에게 보내는 뒤늦은 해답으로,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 하는 일본 국민들을 위해 펜을 들었다. 철학과 철학자의 일이다.
서동욱의 말처럼 우린 멈춰 생각할 수 없다. 바쁘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보다 보면 우리 인생에서 여유 있는 날은 취학 전과 죽기 몇 년 전에 불과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어스름한 저녁, 식사를 때우기 위해 추운 학원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한 끼의 의미와 이 저녁의 의미와 공부의 의미, 더 나아가 그 이후 맞이하는 삶의 의미까지 자문하게 된다. 만약 아이들이 그 의미를 내게 물으면 난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다행히도 두 명을 제외하곤 아직 그 질문을 한 아이는 없다.
“의미가 어디서 왔느냐는 의미의 기원에 관한 물음을 두고 신에게서 왔다는 신학적 가설로 답하기 싫다면, 우리는 의미의 기원으로서 무의미를 생각해야만 한다. 의미의 기원으로서 무의미 말고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는 문제의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기원이 되는 또 다른 의미는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이 다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P.92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어떻게든 가르치려 노력하는 것은 참된 삶이 언제나 현존하지는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결코 완전히 부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 <참된 삶>, P.17
의미가 없는 곳에서 의미가 출발한다는 말은 말장난 같다. 그러나 모든 있음은 없음에서 출발하지 않던가. 그러니 우린 “있음”을 위해 “없음”을 응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참된 삶이 무엇이라 개념적으로 정의하기 전에 그 삶의 존재 자체를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없음의 공백을 느낀 후에야 채움으로 나아갈 테니 말이다.
서동욱의 책을 읽은 뒤 퇴근까지 시간이 남아 알랭 바디우의 책을 펼쳤다. 알랭 바디우가 십 대를 위해 강연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다. 언젠간 아이들이 삶의 의미와 철학의 가치를 물을 때 함께 읽기 위해 미리 사둔 책이다. 철학자가 받는 질문, 그 본질은 같다. 그렇기에 서동욱의 대답도, 알랭 바디우의 대답도 결이 같다. 자기 계발서처럼 북돋아주려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무의미를 받아들여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을, 참된 삶은 현전 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의 씨앗이 떨어진 곳에서 삶의 나무가 자란다는 당연함을, 두 사람의 철학자는 말해주려 할 뿐이다.
"삶이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답하기를 강요하는 날, 그 강요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철학을 시작한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철학은 '사는 연습', 사는 훈련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철학은 얼어붙은 듯 멈춘 채로 허공 중에서 저 홀로 빛나는 영원한 지식을 위해 혼란스러운 삶을 저버리고 '죽는 연습'이 아니다.", P.144.
“운동선수가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연습이듯, 삶의 문제를 뛰어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생각의 연습’이다.”, P.182
이런 이유로 철학은 ‘사는 연습’이고 그 삶을 위한 ‘생각의 연습’이다. 학교 안의 것도 아니고 철학자의 것도 아니며 책 안에만 고여 있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학교의 담장 밖으로, 철학자의 이웃에게, 책으로부터 흘러넘쳐 오는 것이다. 우린 다만 그 사용법을 몰라 피할 뿐이다. 수영과 비슷하다.
수영을 배우기 전, 신혼 때였다. 아내가 막 리모델링을 끝낸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숙박권에 당첨된 적이 있다. 다 좋았다. 전망도 좋고 조식도 좋았다. 다만 수영장은 무용지물이었다. 쓸모없었다. 수영을 못하니 커다란 목욕탕 하고 다를 바 없었다. 난 그 사용법을 몰랐고 사용법을 모르는 수영장은 날 반기지 않았다.
결혼 후, 아내의 만류로 스포츠 클라이밍을 그만둔 내게 아내는 수영을 권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수영을 배우다 딸이 태어나 몇 년 쉬다가, 다시 수영을 한 지 4,5년 됐다. 이제는 호텔을 예약할 때 수영장의 유무부터 본다. 딸과 함께 풀빌라에 가도 종일 놀아준다. 수영을 할 줄 알면 수영장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물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하늘이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개념을 외우고 철학의 역사를 아는 건 수영장의 위치를 아는 것에 불과하다. 수영장에 담긴 것이 물임을 아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건 다른 책과 다를 바 없다. 철학이 주는 위로, 자유, 틈, 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철학 사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수영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 물속에서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수영장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철학을 통해 사는 연습과 생각의 연습을 하고 살고 생각하면서 철학을 연습한다. 무의미의 황무지에서 철학을 씨를 뿌려 삶을 가꾸고 피어난 일상을 사유한다. 미완의 사유, 답을 얻지 못한 사유는 다시 철학으로 가게 하여 미완에서 완성으로, 부족한 답에서 답의 완성으로 우리의 삶을 이끈다. 우린 이렇게 이 순환을 반복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해 꼼지락 거리며 나아간다.
“철학은 바로 철학 아닌 이러한 다양한 사유 방식과 마주할 때 더 큰 깨달음 속에서 자신의 무지를 메워줄 명제와 개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P.337
"세월이 흐르면 책은 늙거나 아니면 반대로 제2의 청춘을 살기도 한다. 슬거나 구운 지 오래된 빵처럼 말라비틀어지는가 하면 면모를 일신하고 다시 각이 날카로워져 새로운 차원을 전면에 드러내기도 한다.", 들뢰즈ㆍ가타리,「천 개의 고원」, 이탈리아어 판 서문 중에서, 김재인 역, 새물결 판본, P.3
책을 읽는 이유다 이 순환의 반경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더 자주 만들기 위해 책을 읽는다. 이 사유의 반경이 클수록, 그 순환의 주기가 자주 올수록 우리는 삶의 무의미에 빠지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갈 수 있다. 손에 떨어지는 개념은 부차적인 것이다. 전리품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