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서 읽은 책 - 04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P.206
알베르 카뮈가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섬>에 바친 헌사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 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진정으로 부러워한다.”(알베르 카뮈, <섬>을 읽고., 장 그르니에, 『섬』, P.27(덕우출판사, 1989년 판본)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 복잡한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우선은 젊었을 때 읽었다면 난 이 책의 깊이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반부, <옴> 장에 나오는 강이 전하는 소리와 그 물결을 보고 깨닫는 장면과 바주데바가 열반의 순간을 스스로 정하여 그 장소를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도 결코 울컥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반부를 넘어 <카말라>의 장을 넘어 <윤회>의 장을 막 빠져나올 때쯤, ‘이 소설을 이십 대쯤 읽고, 지금 다시 읽었더라면 더 좋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때 이 책을 처음 읽었더라면 윤회라는 단어의 틀로 후반부를 읽었을 것이다. <아들>의 장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업보라는 단어가 생각의 선두를 차지했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주인공이 언제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지 알기 위해 서사의 속도를 재촉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머리로 읽지 않았다. 이 소설이 하나의 인생이라면 난 어디쯤 와 있을까. 이 생각이 스치는 순간부터였다. 주인공처럼 부자로, 주지육림에서 보낸 시간은 없었지만 나름 젊은 날엔 사랑의 품에서 보냈던 환락의 시간이 있었다. 욕망의 강도를 사랑으로 착각하며 그렇게 밤과 낮의 구분도 없이 보낸 적도 있었다. 많이 떠들었고 많이 마셨고 많이 먹었고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그랬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답을 찾으려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었다. 답 대신 약간의 평안을 얻었다.
법정 스님의 책 중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라는 책이 있다. 또, <일기일회>라는 책도 있다. 거칠게 합쳐 말하면 한 사람 안에 온 우주가 있고 모두 안에 한 사람의 존엄함이 있다는 것이고, 한 번의 만남 안에 온 생의 기운이 있다는 것이고 모든 전생의 업과 보가 한 번의 만남 안에 응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반부, <옴>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또, 당연하게도 후반부의 시간과 인생에 대한 은유는 라이프니츠와 들뢰즈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인생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주름들, 그 주름 중 하나가 펼쳐지는 신비한 순간들, 그 순간들이 모여, 결국엔 우리의 인생이라는 파노라마를 만들어낸다는 은유. 장대한 강물은 산 중의 작은 샘을 품고 있고 산 중의 작은 샘은 장대한 강물의 시간과 흐름을 품고 있다는 은유. 그 은유에 공감했다.
이 책을 중학생이 읽고 있다. 그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읽고 있을까. 사십 년 후쯤, 다시 읽어보라고 해야겠다. 그때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에 그 아이의 마음을 전해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좋은 만남은 왜 항상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오는 것일까. 아니다. 싯다르타를 읽어보니 모든 것은 그 나름의 때를 맞춰 온다. 그날, 그 아이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겠지. 긴 글은 다른 매거진에 올리기로 하고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