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 조지 오웰

의문에서 읽은 책 05

by 최영훈

바꾼 직업 덕분에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종종 읽다가 여러 맥락에서 충격을 받곤 한다. 우선은 ‘뭐, 별론데.’하는 충격, ‘어, 야, 엄청나구나.’하는 충격, 마지막으론 ‘이게 왜 중학생 필독서야?’하는 충격. 1984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충격을 줬다.


장치에 한 눈 파는 사이

빅 브라더와 감시 방법에 대한 회자에 가려져 정작 이 소설이 가진 플롯의 짜임새와 반전, 심지어 본질적인 주제 하나가 가려졌다. 우선, 다 알다시피 줄리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용은 촘촘한 복선이다. 심지어 줄리아를 만난 이후도 그렇다. 추리소설, 스릴러와 같다. 독자는 서사만 쫓아서는 안 된다. 단서를 저장해둬야 한다. 세 사람의 정치인, 그들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뉴스, 호감이 가는 동료, 이웃에 사는 동료와 그의 아이들, 세 사람의 은퇴한 정치인이 앉아 있던 자리, 심지어 맨 마지막에 붙은 <보유(補遺)-신어의 원리>까지 소설의 한 요소로 자리한다. 그렇다. 소설은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 <신어의 원리>까지 읽은 뒤에야 끝이 난다.


마지막 문단을 읽고 나면, 우린 좌절한다. 절망한다. 101호의 그 처절한 순간에 무너진 윈스턴이 폐허가 된 자신을, 완전히 패배한 자신을, “스스로의 추방”을 통해 “투쟁은 끝났다.”는 독백으로 시인하는 주체와 자아 없음의 사태를 받아들이는 윈스턴을 보며 우리도 함께 무너진다. 그 긴 고문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올리는 다이얼 앞에서도 의지를 짜내어 질문을 던졌던 윈스턴 아니었던가. 마지막 반전을 기대하여 우리는 그 무거운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혁명의 가능성은 마지막 장에서 완전히 소멸된다. 자신이 사라진 자신을 보며 흘리는 윈스턴의 눈물 속에 휩쓸려 사라진다.


<신어의 원리>의 역할

그런가? 정말 끝인가? 난 이정서가 번역한 새움출판사 판본으로 읽었다. 번역가 이정서는 십여 년 전 카뮈의 <이방인> 번역 문제를 제기하여 출판계와 학계에 적잖은 파란과 파랑을 일으켰던 인물. 그는 역자의 말에서 이 소설의 미국 출판을 앞두고 미국의 이달의 책 클럽과 작가 사이에서 벌어졌던, <보유-신어의 원리>를 둘러싼 실랑이를 언급한다. 짧게 말하면 미국 쪽 사람들은 이 부분을 사족으로 보고 뺐으면 했던 것이고 조지 오웰은 이 부분이 있어야 비로소 소설이 완성된다고 여겼기에 버텼다. 물론 작가의 주장대로 함께 출판됐다. 이로 인해 이 소설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품게 된다. 그 가능성의 해설을 위해 역자는 토마스 핀천의 평론, 그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인용하며 설명한다.


<신어의 원리>는 전체가 과거 시제로 쓰여 있다. 일관되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역사가 됐다는 것이다. 신어 자체가, 신어를 사용했던 소설 속 오세아니아 제국과 그 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역사의 유물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어의 원리>는 한때 유행했던 신조어, 또는 기술, 문화, 풍습을 설명하듯 과거 시제로 담담히 써진 것이다.


작가가 남긴 물음표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소설에서 서사의 마지막 단락과 <보유 : 신어의 원리> 사이에 상상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혁명이 났는지도 모른다. 어느 하나가 전쟁에서 이긴 뒤 한 나라의 역사를 재조명한 뒤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는지-그렇다면 더 우울하다-모른다. 그러나 다른 “신어”를 강조하지 않으니 이건 아니다. 그야말로 신어는 과거의 유물이 됐다. 정상 언어가 회복됐고 그만큼 정상적 사고가 돌아왔으며 정상적 정치 시스템이 돌아왔다. 그리 봐야 한다.


이 소설은 결국, ‘희망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저항 세력인가, 일말의 의식 있는 당내 세력인가, 아니면 ‘프롤’이라 불리는 프롤레타리아인가. 지식도, 자본도 없는 그 당 밖의 세력들이, 윈스턴의 바람처럼 마지막 희망이었을까.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의 끝과 보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 "그 책"의 내용을 통해 조지 오웰이 토로한 내용처럼, 이 사회의 상태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지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생산하며, 무엇을 위해 이렇게 경쟁하며 살고 있으며, 이 나라와 세계와 사람들을 무엇을 위해 투쟁하듯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조지 오웰은 그 사이에 거대한 물음표 하나를 남겨 놓은 것이다. 답은 독자만 할 수 있다.


사족

이 소설이 청소년 필독서인 것이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행간을 놓치지 않고 읽어야 하고 억압된 사회를 그렸다는 단순한 소개를 통해 소설로 들어가서도 안 된다. 차라리 한 편의 사회 정치 스릴러 영화를 보듯이 이 소설을 읽어나갔으면 좋겠다. 모두를 의심하고 혁명의 가능성과 마지막의 반전을 기대하며 말이다. 더 긴 이야기는 독서 레터를 통해 풀어 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