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의 독서법-미치코 가쿠타니

의문에서 읽은 책 06

by 최영훈

북카페에서, 두 시간

2026년 2월 20일, 오후 두 시 사십 분쯤, 딸과 나는 경성대학교 앞 북 카페, 반월에 앉아 있었다. 딸은 달라스 공항 서점에서 산 Lauren Roberts의 <Powerless>라는 판타지를 읽었고 난 미치코 가쿠타니의 <서평가의 독서법>의 마지막 여섯 꼭지를 읽었다. 이후,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있는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이어 읽었다.


반월은 가 본 북카페 중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분위기 있는 카페다. 메인 홀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책을 안 읽을 거면 그냥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줄 정도로 차분했다. 우린 그곳에서 적당한 자리를 못 찾아 집중존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선 속삭이는 대화조차 금지였다. 그곳에서 딸은 정확하게 두 시간을 꼼짝도 안 하고 책을 읽었다. 네 시 사십오 분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책을 덮을 때까지.


애독자와 애서가

최근, 난 딸에게 읽고 싶은 책을 읽으라고 했다.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읽고 싶은 책을 읽을 때의 재미, 그 경험의 누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84>과 <데미안>이든, <자유론>이든, 필독서를 읽는 힘은 애독서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애독자라는 말은 있어도 필독자라는 말은 없다. 애서가라는 말은 있어도 필서가라는 말도 없고. 필독과 필서의 앞에 애독과 애서가 있다. 아니 두 독서와 독서가는 공존한다. 일종의 투 트랙이다.

십 대 아이들과 책을 놓고 이야기를 하고 글쓰기에 대해 실랑이를 하다 보니 알게 됐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일찍부터 책을 읽는다. 지역의 학부모들의 단톡방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영어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은 네댓 살부터 영어로 된 책을 읽는다. 방문하여 책을 읽어주는 학습 콘텐츠를 구매한 부모“덕”에 더 일찍부터 책을 접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 뒤 유명 독서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G, C, L H... 등등. 물론 다른 과목 학원도 함께. 아이들은 다른 과목 학원의 숙제를 하듯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교재의 문제를 푼다. 그렇게 중학생이 된 뒤, 책 전체의 맥락, 교과서 전체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구받는다. 답이 정해진 문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맥락, 주제, 의미, 행간을 파악하지 못한다. 인물, 소재, 줄거리는 기억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부모의 철저한 계획을 통해 성장하여 유명한 사립중학교에 진학한 소년에게 물었다.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지, 추리소설, 공포소설, SF와 스릴러 등을 읽어본 적 있는지,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심지어 밤을 새 본 적이 있는지.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소년에게 <데미안>은 멀다. <노인과 바다>는 난해하다. <1984>도, <화씨 451>도.


반면, 독서의 재미를 아는 아이들은 어떤 책이든 읽는다. 글자 수가 많고 페이지가 두꺼워도 상관하지 않는다. 요즘 딸이 읽는 책은 5백 페이지가 넘는다. 페이퍼백이라 글자도 작다. 당연히 영어다. 그러나 언어도, 두께도 문제 될 게 없다. 재미가 있으면 페이지는 넘어간다. <조국의 법 고전 산책>, <청춘의 독서> 같은 책도 나름의 재미를 발견했기에 몰입해서 읽었다. 그렇다. 재미를 아는 독서가는 재미의 종류도 많다.


99권의 책에 바친 헌사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1983년부터 2017년까지, 뉴욕타임스의 서평을 담당했던 저자가 아흔아홉 권(물론 책의 권수는 훨씬 많다. 한 작가의 여러 작품, 같은 주제의 여러 작품을 소개하는 글도 제법 많기 때문이다.)의 책을 소개한다. 아는 책과 모르는 책, 읽은 책과 읽고 싶었던 책이 있다. 물론 미국의 독자를 주 대상으로 한 글이기에 논픽션은 주로 미국의 역사, 사회 문제, 정치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작가들 또한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랩걸>, <1984>, <해리포터>, <황무지>, <핏빛 자오선>,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전체주의의 기원>, <이미지와 환상>, <페스트>와 같은 작품처럼 우리 곁에 있었고 있으며 영원히 있을 책들이 대부분이며, 그 작품들의 해석과 의미 또한 충분히 동시대적이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녀가 40여 년 간 뉴욕타임스의 독자를 위해 썼던 “책에 관한 글”은 세계의 모든 독자를 위한 글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그녀의 글이 와닿은 것은, 우선 쉽기 때문이다. 처음 몇 개의 글을 읽을 때는 너무 담담한 거 아닌가, 좀 “슴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양냉면처럼 말이다. 그러다 좀 더 읽다 보니 꼭 써야 될 글에 꼭 필요한 단어만 사용하여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인 글들, 그러면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글. 책 보다 앞서지도 않고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작가에게 훈계를 하지도 않는 글. 좋아하는 작가나 책에 대해서도 호들갑 떨지 않는 글. 그래서 쉽게 읽히면서도 정확하게 전달되는 글이었다.


독서의 이유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은 술을 왜 마시냐는 질문만큼 의미가 없다. 대체로 이런 질문엔 그 행위의 효용을 따지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니 이런 질문에 가장 좋은 답은 그냥이다. 이보도 더 나은 대답을 굳이 원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삶의 무의미를 견디기 위해 읽는다고. 안에서 의미가 스스로 나오지 않기에 밖에서 의미를 욱여넣기 위해 읽는다고. 미치코 가쿠타니가 미국의 정치와 역사에 관한 책에서 반복해 말하듯이 세상은 엉망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는 과정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 이 “뭐” 같은 세상을 그나마 희망이 담긴 시선으로 보기 위해서라고. 세상의 부조리를 견디고 바라보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이 모든 그럴듯한 답보다 더 나은 대답은 “그냥”이다. 더 재미있는 게 있다면 그걸 하면 된다. 난 이게 재미있다. 이런 대답이다. 더 독하게 답한다면, 사람은 애를 낳기 위해서만 섹스를 하는 동물이 아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똑똑해지기 위해서도, 잘난 체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읽는 것이다. 무수한 재미의 향연에 취해 페이지를 넘길 뿐이다. 그뿐이다. 그렇게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