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 레이 브래드버리

의문에서 읽은 책 07

by 최영훈

난 왜 책을 좋아할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다. 딸의 공부방 한구석에 슬그머니 쌓인 책을 본 아내가 잔소리 끝에 덧붙인, “그건 강박”이라는 말도 정답이 아니다. 알다시피 강박은 증상이지 원인은 아니니.


기원을 찾아서

결국, 오랜만에 독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책의 기억은 초등학교 1, 2 학년 때다. 지금은 시가 된 파주에 살았는데, 행정 지역명으로는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였다. 집 앞에 터무니없이 넓은 공터가 있었다. 펜스 없는 야구장 같았다. 막 80년대로 접어든 그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놀거나 뛰거나 집에 있는 책을 읽고 또 읽는 것뿐. 낡은 세계위인전집, 열 권자리 백과사전. 빨간색 등걸의 동화집. Why 시리즈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학습만화전집들.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부터 책과 독서는 의미와 목적을 바꿔가며 곁에 있었다. 그러다 특별해진 건 삼십 대 중반쯤, 신앙을 지닌 채 십 대와 이십 대, 그리고 삼십 대 몇 년을 보낸 후였던 어느 해, 어느 날,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 후부터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면 뭔가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십 대와 이십 대에 걸쳐 삶과 주체의 의미를 모두 맡겼던 것에서 무의미를 발견했다면, 그 뒤부터는 지난한 순례, 혹은 공사가 실행되어야 했다. 나를 찾는 순례, 나를 재구성하는 공사.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독서였다.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그 뒤로 이십여 년이 흘렀고, 난 최근에서야 자신을 볼 수 있게 됐다. 좋은 점과 혐오스러운 점, 모두를 가진 나를.


책과 독서를 위해 바쳐진 책

책에 헌사된 책은 많다. 지금 막 생각나는 책으로는 당연하게도 보르헤스의 <바벨의 탑>이 있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있다. 얼마 전에 읽은 미치코 가쿠타니의 <서평가의 독서법>도, 소피 카사뉴 브루케의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도,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뒤마 클럽>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도 생각난다. 생각해 보니 <굿 윌 헌팅>의 주인공 집에 있는 건 책밖에 없었다. 그래,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도 책에 바치는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 청소년들이 에세이를 쓰기 위해 선택하는 인기도서 중 하나라는 명성에, <기억전달자>, <멋진 신세계>,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문학의 걸작 중 하나라는 명성에 끌려, 학생에게 이 책을 추천했고 덕분에 나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일반화된 명성이 이 책의 진가를 약간은 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배경은 미국이다. 그러나 시대도, 도시도 명확하지는 않다. 늦여름 북상하는 태풍의 경로를 알리는 일기예보처럼, 창공을 가르는 전투기들은 곳곳에 전쟁의 위기감을 흩뿌려 놓고 있다. 이런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용케도 무덤덤하게 살아간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는 끊임없이 라디오와 음악을 들 수 있고, 모든 벽을 메우고 있는 TV에선 자극적인 드라마와 광고가 끊임없이 나온다. 지하철에서도 광고는 쉴 새 없이 나오고 자동차들은 고속도로를 날듯이 움직인다.


그 도시의 책은 없어졌다. 불태워졌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다. 시작은 외면이었다. 책을 안 보기 시작했다. 아니, 요약하고 줄여주고 쉽게 만들어주기 원한다. <모비딕>은 열 페이지로 줄어들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권으로 요약된다. 진본과 원본의 의미는 실종된다. 그러다 각종 이익단체, 소수단체들이 각종 책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걸 바꿔라, 저걸 삭제해라, 그 책은 평등에 위배된다, 우리 신념에 어긋난다. 이 책을 없애니 저들이 좋아하고, 저 책을 없애니 그들이 좋아한다.


이런 분위기에, 때마침 정부까지 나서서 평등의 프로파간다라는 숟가락을 얻는다. 이 참에, 고상한 생각, 불필요한 생각, 실용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심지어 우울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책들은 다 불태웁시다. 오케이, 찬성. 불길을 잡던 이들이 방화수(Fire man)로 전환됐다. 그들의 손에 의해 책은 없어졌다. 불태워졌다. 책과 함께 책을 읽는 사람도, 공부한 사람도 사라졌다. 대학의 인문학과와 사회과학도, 도서관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 24시간 방송, 잠들면서 듣는 라디오가 자리를 차지했다.


주인공 몬태그는 의미가 사라진 일상과 종일 벽면의 TV에 매달려 사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실종된 그 “뭔가”를 찾기 위해 책을 읽자고 한다. 숨겨 놨던 책을 쏟아 놓은 뒤, “우린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이렇게 혼란에 빠진 우리, 당신과 수면제와 차, 그리고 내 일을 해결해야 한단 말이야.”라고 아내인 밀드레드에게 호소하며 함께 책을 읽자고 한다.


반면, 몬태그의 상사인 서장 비티는 책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후 책을 읽지 않기 시작한다. 책을 사랑하고 읽었던, 그래서 지금도 수천 권 이상 갖고 있으면서도 그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는 세월 동안 그 나름, 인생의 파도를 겪었고, 그 파도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동안 책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에게 책을 태우는 건, 일종의 복수다. 수천, 수만 권의 책을 고이 모셔놓기만 하는 것도 복수다. 사라지는 책만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펼쳐지지 않는 책도 의미를 상실한다.


몬태그가 막바지에 만난 책 사람들(Book People)은 각자가 한 권의 책이었다. 누군가는 책 한 권을, 누군가는 어느 책의 어느 장을 외우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곳곳에 흩어져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지만 보고 책을 평가해선 안 된다오.”라고 했던, 그 무리 중 한 명인 그레인저의 말처럼 머릿속에 책 한 권을 간직한 채 조용히 살고 있었다. ‘난 인류를 위해 책을 저장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야.’와 같은 자각이나 으스댐도 없다. 그저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낡은 책들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시대의 손길을, 문명의 부활을, 갈망의 시선을.


책 - 삶의 의미, 혹은 무의미

몬태그, 비티, 두 사람 모두에게 공감을 하며 이 책의 후반부를 달렸다. 책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책 안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람, 둘 모두에게. 책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을 말릴 필요도 없지만, 책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람과 싸울 필요도 없다. 사람이 저마다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안을 채워나가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누군가에 읽힐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라면 모두에게 공감받을 의미 같은 건, 혹은 인상을 남길만한 의미 같은 건 넣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삶이다.


반면, 자신의 삶이 역사의 한 점, 혹은 티끌 같은 역할이라도 하고, 문명의 길고 긴 사슬에서 하나의 고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운명을 예감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좋은 삶”, “더 나은 삶”, “더 나은 우리”를 찾아 책을 들춰 볼 테고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필요한 답을 간직한 존재이고자 할 것이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삶이다.


역설적이게도 작가의 두 개의 후기, 그리고 인터뷰를 읽으며 저 두 삶, 모두를 긍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을 통해 작가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결국엔 책에 관한 이야기, 작가에 관한 이야기, 더 나아가 놀랍게도 PC에 대한 경멸과 냉소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책이 1953년에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예언자이자 선지자적이다.


책을 읽히려는 부모와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진 아이들에게 그 필요와 강박을 넘어선 재미와 의미를 찾게 해 주려고 애쓰고 있다. <1984>를 힘겹게 읽은 소년에게 학원 서가에 꽂혀 있던 게리 폴슨의 <손도끼>를 쥐어줬다. 다음 주, 재미있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됐어. 한 번도 추리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소년에겐 코난 도일 단편집을 쥐어 줬다. <바스커빌가의 사냥개>가 표제작이다. 재미있게 읽으려나.


손에서 스마트 폰을 놓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책에 홀려 밤을 새 본 적이 있는 옛사람이 그 재미를 전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책을 통해 삶의 의미와 인생의 항로를 찾는 건 그다음이다. 솔직히 말해, 책을 안 읽어도 되는 삶이라면,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래도 된다.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묘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삶이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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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고전을 읽을 때마다 이후에 등장한 얼마나 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고전에 영향을 받고 빚을 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 또한 훗날 제작 된 <이퀼리브리엄(2002)>, <일라이(2010)>와 같은 영화에 영향을 줬다. 심지어 어떤 장면, 어떤 모티브는 그대로 사용됐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만화이자 영화인 <도서관 전쟁>도 이 소설에 신세를 지고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