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서 읽은 책 08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P.12
최근에서야 미스터리가 풀리고 있다. 평일에는, 이르면 오후 다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다섯 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을 시작으로 대치동에서 여기까지 온 유명한 G 독서 학원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배워온 아이들이, 중학교 1, 2 학년 정도가 되면 영어와 수학은 고 1, 2 수준의 모의고사를 풀 수 있는 아이들이 왜 말과 글은 이 모양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책을 좋아해서 일 년에 백 권 이상을 읽는다는 천재 소년도, 어려운 고전 소설도 척척 읽어내는 소녀도 글쓰기 그 자체를 어려워했다. 물론 술술 써내는 아이도 있지만 그 글들은 목적이 없고 대상이 없어 혼자 웅얼거리는 느낌을 줄 뿐이었다. 또, 어떤 녀석은 논문 형태의 구조적인 글을 잘 쓰지만 자기 생각과 입장으로 소설과 영화를 판단하여 비판하는 비평문에는 곤란함을 겪었고, 그 반대의 경우인 녀석도 있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다. 우선은 뭐든 “양 치기”를 하는 것이 문제다. 이 용어는 소위 학원가와 학생들이 주로 쓰는 “업계 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양한 유형의 문제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많은 문제를 풀어보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이런 형태의 공부법이 독서에도 적용된다는 것.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책의 레벨 업과 양을 쌓기 위해 독파해 나간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돌파와 돌격이다.
그 결과 주인공이 누구고 내용은 뭔지는 대략 알고 있으나 문장을 음미하지 못하고 서사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되는 독백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지나친다. 때문에 읽었다는 책 어디에도 띠지 하나가 붙어 있지 않다. 밑줄 하나 그어있지 않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아니다. 열혈 엄마들이 손에 쥐어준 깨끗한 자기 책이다.
이로 인해 책을 읽어도 문장이 쌓이질 않는다. 어떤 것은 기억하여 나중에 써먹겠다는 야심도 없다. 흉내를 내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결국 책을 읽어도 마음속에 글이 쌓이지 않는다. 현재의 두터움을 의미의 포착과 누적이 만드는 것처럼 독서로 만들어지는 내면의 두터움은 속도와 양에 있지 않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P.32
겨울방학 동안 학생들과 <기억전달자>, <1984>,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다른 클래스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싯다르타>를 읽은 후 <화씨 451>을 읽었다. 헤세의 두 작품을 제외한 네 작품은 소위 디스토피아 4부작으로 불리곤 한다. 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고르라면 “기억”이다. 기억을 봉인하고 은폐하고 바꾸고 망각하고 불태운다. 다들 오늘만 살고 현실만 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기억이 없는 세상은 왜 디스토피아인가를.
누군가 성찰이라는 단어를 얘기했다. 맞다. 성찰과 반성이 없는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질 수도 없고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도 없다. 오늘의 무게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어제의 무게가 있어야 하고 내일의 무게를 더 가볍게, 혹은 더 무겁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록을 남기고 글을 쓴다. 페이스 북의 가장 쓸만한 기능은, 어쩌면 몇 년 전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이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가장 빨리 낡아버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는 뜻도 된다.........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슬프다.”, P.191
오랜만에 고전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감동했다. 좋은 작품이 오래 남는 것인지,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오십이 넘은 지금,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물론 아니다. 사람이나 책이나 가치 없는 존재는 아무리 오래되어도 여전히 그러하다. 가치는 상대적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 상대적 주관성을 넘어 객관의 성좌에 오르는 존재는 언제나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뭐든.
그 가치를 미처 알기도 전에 너무 많은 것들이 스쳐 가기에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판단을 그 시대의 소음과 사람들의 출렁임에 일임한다. 무책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앉아 다음 재료를 넣어주길 기다리는 편의점 김밥처럼 우리는 눈앞에 놓인 것을 보고 소비해야만 한다. 음미할 시간이 없다. 음미.......
앞서도 잠시 얘기했지만, 일 년에 백 권 이상 읽는 녀석의 글도 엉망이다. 그 녀석에게 문장에 대해 얘기했더니 충격을 받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이야기를 쫓아 달음박질하기 바빴기에 책 어디에도 띠지를 붙인 적도, 밑줄을 그은 적도 없다. 그 녀석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싸구려 분식집에서 막 끓여낸 김치찌개와 밥만으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사람처럼, 그렇게 책을 읽어왔던 것이다. 일종의 성과 주의적 독서고 과시적 독서다. 애들 탓이 아니다. 부모 탓이고 사회 탓이고 그걸 부추기는 학원들 탓이다.
황현산 선생님의 문장은 얼핏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천천히 다시 읽으면 울림이 있다. 섬세한 단어와 행의 배치가 눈에 들어오고 단락의 배치는 극적이다. 80년대 말에서 2천 년 대 초반의 글들이 한 권에 묶였는데, 겉도는 글이 없다. 그의 글이 오래전부터 탄탄했다는 증거다. 읽는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훈계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억지 감정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호수를 건너는 나룻배처럼 담담한 글은 천천히 걸어 들어와 무심히 말을 걸뿐이다. 낮은 목소리여서 귀를 기울인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말이 책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