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서 읽은 책 09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랑에서도 사람들은 시간도 없고 생각도 짧아 사랑하는지도 모르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열린 책들 판본, P.13
일상은 건조하다. 습기와 윤기는 일상의 외부로부터 제공된다.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말했듯이 매끄러운 것은 상품화되었다. 에로스가 그리된 것처럼. 1940년대, 뜨거운 도시 오랑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늘 일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중요한 것들은 제도와 관습 등으로 옭아매거나 이유 없는 충동으로 파편화된다. 소란스러운 사소한 것들과 지루하거나 파편으로만 스쳐가는 중요한 것들을 쉴 새 없이 왕복하는 이유는 하나다. 죽음과 같은 공포를 잊기 위해서다. 질병, 이별, 파산, 실패, 좌절과 같은 닥쳐올지도 모를 공포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오랑에서의 쥐들이 페스트의 발병 이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으로 억누를 수 있는 공포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상의 밖이나 발걸음의 지하에 있어야 한다.
“두려움, 그와 동시에 반성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P.36
진정한 두려움은 묻어둘 수 있고 몰아낼 수 있으며 모른 척할 수 있는 공포를 밀어낸다. 쥐와 같은 혐오스러운 것들은 말 그대로 혐오의 대상일 뿐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스티븐 킹의 <야간근무(Graveyard Shift)>에 나오는 지하실의 거대한 쥐 같은 건, 현실엔 없다. 쥐는 쥐일 뿐이다. 진정한 두려움이 찾아오면 그제야 우린 반성하게 된다. 또 우리는, 죽음이라는 공포, 가족을 잃는다는 공포와 직면하게 되면 그제야 겨우 시선을 갖게 된다. 늘 곁에 있던 사람, 차 한잔, 부산했던 거리, 내 위에서 땀을 흘리며 본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던 그와 그녀의 특별함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도취와 최면, 위장과 가식, 가면과 예식 뒤에 숨겨왔던 타인과 이웃과 공동체와 사회와 도시의 민낯을 보는 시선도 얻게 된다. 아니 그제야, 그 민낯이 보인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그 민낯을 보고 역겨워했고, 카뮈는 그 민낯을 노출한 채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그 연민을 감추기 위해 소설은 “역사가”를 자처하는 진술자를 내세운다. 재난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는 누군가가 화자가 된다. 독자는 어렴풋이, 이 화자가 이들 중 한 명이 아닐까 하고 추측할 수도, 심지어 나와 이 소설을 함께 읽고 있는, 그러나 분주한 개학 이후의 몇 주로 인해 절반 정도밖에 읽지 않은 소녀처럼 단박에 알아챌 수도 있지만 카뮈는 소설의 말미까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소설 속 남자들의 시선, 그들의 어깨너머로 오랑의 투쟁과 죽음들을, 페스트와 동행했던 우울한 십 개월을 담담히 본다. 카뮈도 그걸 원한다. 조금 떨어져 봤으면 좋겠어. 동정은 필요 없어. 안타까움도 넣어둬. 지금은 그저 이 사내들과 함께 이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함께 견뎌줘. 난 카뮈의 제안에 리유, 랑베르, 타루의 뒤를 묵묵히 따라다녔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327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정직입니다.”
“정직이란 게 도대체 뭐죠?”,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랑베르가 물었다.
“객관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제 경우로 본다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P.211
소설은 이성적인 좌절과 막연한 희망이 교차한다. 이성적인 좌절은 리유의 합리적인 성실을 가능케 한다. 그 성실엔 영웅주의가 없다. 영화 <아웃 브레이크>나 <월드워 Z> 같은 극적인 반전도 없다. 혈청의 개발은 환자들 사이를, 그들이 죽어가는 도시의 골목을 누빌 수 없는 늙은 의사들의 몫이다. 정신 줄을 놓은 좌절은 무기력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지만 이성적인 좌절은 할 수 있는 걸 하게 한다. 할 수 있는 것이 희망하는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없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면 해야만 한다. 그것이 재난의 공간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막연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도시 경계 너머에서 오는 소문에 귀 기울인다. 부질없고 근거 없는 전망, 역사에 기댄 예측이 담긴 기사를 탐독한다. 그 희망마저 사라지면 종말의 심리가 찾아온다. “금세 미래를 포기”한다. 죽음의 순번을 기다리며 만취의 순례를 시작한다. 웃고 떠들고 내일이 없을 것처럼 탐닉한다. 근거가 없기에 막연했던 희망은 몰아치는 죽음의 통계 앞에서 절망으로 전락하고 그 추락의 시간은 쾌락의 비명으로 채워진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타루가 말한 바 있었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P.372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P.395
재난과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지위도 소속도 고향도 중요하지 않다. 판사 오통에게도 외부인 랑베르에게도 재난은 동일하게 찾아온다. 부정을 해도 소용없다. 사랑이, 추구하는 가치가 재난의 시간과 공간 밖에 있기에 나 또한 밖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직면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는 것이다. 회피는 쉽다. 직면은 어렵다. 아니 하드보일드하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구토> 속 혐오의 시선은 쉽다. 반면 카뮈가 <페스트>의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시선은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그 시선은 누아르적이고 하드보일드하다. 영화 <시카리오>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카메라의 시선, 그 시선을 카뮈는 독자에게 요구한다. 함께 투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말고 똑바로 봐 달라. 이 숭고한 투쟁을.
숭고함은 무가치하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그 “숭고함”의 본질 중 하나는 무가치함이다. 고딕 성당의 첨탑, 미켈란젤로의 벽화, 벡신스키와 베이컨의 그림들은 무엇으로도 환원되고 환산되길 거부한다. 도도하게 내려다본다. 바라보라. 경외하라. 그게 전부다. 성취와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일에 쏟는 열정, 무모한 도전, 라캉이 말한 기사도적 사랑, 어쩌면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까지. 의미와 가치가 성과로 판단되는 시대에 성과와 성취, 심지어 물리적 가치까지 외면하는 시도는 숭고하다. 리유가 말한 성실은 그래서 더 서늘하다. 역설적이게도 리유와 타루의 실천은 시대와 사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사람이기에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다. 그뿐이다. 코타르의 이기심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다.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란 “영화관 최신작”들이다. 드라마틱하지 않은 드라마를 다루는 이 소설에서 가장 가벼운 농담이자 진실이 담긴 대사다. 외부에서 새것이 들어와 소화된 후 밖으로 나간다. 이것이 일상을 살아내는 도시의 본성이자 기능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새것을 추구하고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요즘 아이들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책을 읽어 온 학생에게 처음 던지는 질문은 늘 같다. “어땠어?”, 아진이는 “재미없었어요.”하고 대답했다. 3부까지 읽었다고 하기에 그 고비를 넘어가면 괜찮다고 했다. 물론 그 뒤에도 드라마틱한 묘사는 없다. 그저 담담히 처절할 뿐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담담히 처절하다. 극적으로 처절하다면 우리는 진즉에 이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감당할 만큼 처절하기에 담담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카뮈의 시선에 연민이 담겨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시지프의 신화>처럼 묵묵히 돌을 밀어 올린 후 정상에서 다시 돌이 굴러내려가는 동안, 그 짧은 시간을 최대한 만끽하며 사는 것, 그것이 삶이다. 카뮈도, 어쩌면 들뢰즈도 삶을 그리 봤다. 최대한 살아내기. 성실하게 투쟁하며. 다시 읽은 카뮈의 <페스트>는 삶의 자세에 대해, 그 당연하기에 쉽게 잊는 그 자세를 다시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