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의문에서 읽은 책 11

by 최영훈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 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 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兵營)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軍紀)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P.72


각광

어린 시절, 우리는 다들 주목받았다. 태어나는 환경이 아주 비참한 경우가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축복받고 주목받는다. 그 조건 없는 주목의 시기를 지나면, 우리는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타자를 인식하게 되면 그 증명의 압박은 나로부터 발생하고 타자로부터도 온다. 문지방을 넘어 사회와 접하게 되면 증명의 요구는 더 커진다. 증명의 대가는 각광이다. 상장이든, 메달이든, 석차든, 합격이든, 그 자잘한 성과들 뒤에 오는 것들은 각광이다. 많이 증명할수록 빛이 쏟아진다. 그 쏟아지는 빛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빛에 취해 길을 잃는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에겐 길을 찾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길은 대체로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주어진다. 이 또한 각광의 조건이다. 빛을 받기 위해선 빛이 쏟아지는 길에 있어야 한다. 주목을 받는 길, 빛을 받는 길은 정해져 있다. 다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각자의 길은, 도로의 중요도에 따라 관리 주체와 관심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타자와 사회로부터 평가받는다. 어떤 길은 A, 어떤 길은 B...


순육(馴育)

순육이라는 단어는 낯설다. 훈육이 말로 기르는 것이기에 사람을 향하는 말로 쓰여 익숙하다면, 순육은 길들여 가르치는 것이기에 짐승을 기를 때 쓰는 말이라 낯선 것이다. 현실에선 두 가지 방법 모두 아이들에게 사용되니 순육이든, 훈육이든 일상적으로 쓰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러나 짐승에게 쓰는 말을 사람에게 쓸 수 없기에 우리는 그동안 쉬쉬하며 저 단어를 숨겨 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말이 없다고 현상이 없는 건 아니다. 새로운 현상과 사물이 있는 곳에 말이 피어나고, 이미 피어난 말은 숨기고 싶은 현상의 민낯을 세상에 웅변한다. 현상과 말은 그렇게 서로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의 거울이 된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인용은 문단 전체다. 헤르만 헤세의 글 중 이렇게까지 신랄한 문단이 또 있을까? 역설이다. 저 문단에 담긴 세상의 논리를 온몸으로 반대하고 저지하고픈 작가의 저항이 담긴 역설이다. 저 문단 뒤에 입시의 서사가, 기숙학교의 서사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저 문단은 일종의 예고편인 것이다. 자, 이제 기벤라트는 잘라지고 깨어지고 다듬어지고 개척되고 경작된다. 우린 그 과정을 묵묵히 본다.

미래

모인 아이들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버티면 나라가 인정한 목사가 된다. 각지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선발된 수재들이다. 기벤라트는 그중에서도 2등을 했다. 전국 2등이다. 정해진 미래고 눈에 보이는 과정이다. 그러나 일부는 통과하지 못한다. 학교의 역사 동안 스스로 생을 등지거나 하일너처럼 말썽을 부려 쫓겨나거나 힌딩거처럼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거나 기벤라트처럼 신경쇠약에 걸려 귀향하는 학생이 있었다. 미래는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경로를 택하여 가고 싶은 것이리라.


그 경로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 길 끝에 다다르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다.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수학. 그 배움을, 삶에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배우는 것을 견디는 것이 그 경로, 그 과정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견디는 것은 곧 길들여짐을 의미하고 길들여짐은 곧 규격화를 의미하니.


대안

우리는 실패했을 때, 그 경로를 다 통과하지 못했을 때 좌절한다. 그 좌절은 수습되어야만 한다. 좌절 뒤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난 기벤라트가 그 대안을 받아들였을 때 잠시 안도했다. 한 소녀를 만나 서툰 연애를 했을 때도 안도했다. 허둥지둥 대고 우왕좌왕했지만, 그래, 겨우 십 대 중반 아닌가. 엠마가 불쑥 떠나버렸지만 아직 어리니 살다 보면 또 만나지 않겠는가. 난 기벤라트의 남은 세월을 상상했다. 분명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벤라트는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사랑도 배워야 했다. 우정도 배워야 했다. 맘에 안 드는 사람과 어울리는 법도 배워야 했다. 사과의 즙을 짜는 법도 배워야 했다. 만끽해야 할 것도 많았다. 소녀와는 이제 겨우 키스를 했을 뿐이다. 술도 이제 겨우 제대로 마셨을 뿐이다. 선반 앞에서 서서 겨우 나사 다듬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의 작업복은 더 더러워져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배우느라 십 대의 몇 해를 보냈고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 할 때, 그 활기에 찬 날 뒤에 많은 첫 번째 휴일에 생을 마감했다. 기벤라트가 자살한 것으로, 그 결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기벤라트는 만취 끝에 귀가를 하다 사고로 죽었다. 안타까웠지만, 뭐랄까,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단 하루라도 그 나이답게 살다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클래식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냉소적이고 더 우울하고 더 답답하다. 몇몇 어른들은 위선적이고 몇몇 어른들은 어리석고 가식적이다. 한 아이의 성취가 가족과 소읍과 그 소읍의 여러 사람에게 자랑이 될 때 아이의 일상과 건강은 기꺼이 희생된다. 희생되어 마땅한 것이 된다. 그것이 19세기의 독일의 현실이었고, 어쩌면 지금, 이 나라, 이 사회, 우리의 현실인지도. 그래서 헤세의 성장 3부작 중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죽은 것은, 아이의 실재적, 상징적 죽음의 원인을 따져 묻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이 소설이 학교와 교육 당국의 권장도서인 것은, 아마도 그들이 읽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니면 잘못 해석했거나, 아니면 그럴듯해 보이거나. 그렇다면, 그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