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의 윤리학 - 우치다 타츠루

의문에서 읽은 책 13

by 최영훈

오래전 얘기다. 시간의 무게를 좀 무겁게 하는 표현을 가져오면, 사반세기 전의 일이다. 대학원의 한 선배가 체 게바라 평전을 들고 다녔다. 거 왜, 흑적색 바탕에 체 게바라의 얼굴이 판화처럼 인쇄되어 있는 표지로 된 것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그렇다 유치한 짓이다. 21세기로 접어들었을 때, 혁명은 고사하고 학생 운동조차 이미 사망 선고를 받아서, 그 유명한 한총련은 내가 다니던 대학에 초라한 둥지-교정 어디에 박혀 있었는지, 졸업할 때까지 몰랐다. - 를 틀고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우습게도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그런 책을 들고 다니는 건, 뭐랄까, 지금 생각해 보니 흔하디 흔한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터프하지도, 거침없지도 않았던 책상물림들이 체 게바라라니.......


내가 좋아하는 일본 학자들 중, 터프한 부류가 있다. 사사키 아타루와 아즈마 히로키 등이 동년배의 그런 이라면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이들 큰 형님, 대부 정도의 위치이리라. 그래서인지 이 양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야, 이 양반 거침없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거침없음의 원류라고나 할까, 그 싹수가 보이는 책이 바로 이 데뷔작이라면 데뷔작인 책이다.


이 양반을 처음 접하게 된 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였다. 어려운 사람을 잘도 모아 놨구나, 하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고, 술술 읽었다. 글도 잘 쓰는데, 약속도 지키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다음엔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또 이 양반의 책, <레비나스의 사랑의 현상학>이 눈에 들어와서 읽었고, 그 뒤로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등을,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레비나스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가이드로도 훌륭하지만 할 말은 다 하는, 그러면서도 훈계조도, 시비조도 아닌, 그 특유의 담담한 문체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이 데뷔작에서 다루는 이슈들을 보면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일본의 정치 문제, 패전국으로서 피해국에 대한 인식과 사과의 문제 등에서 냉담하리만치 자기 할 말을 다 한다. 이즘과 안티 이즘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포지션을 지키면서 제3의 말을 한다고나 할까.


특히 후반부,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적 논쟁을 다루는 부분은 백미인데 둘 다를 읽어본 독자라면, 특히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갖고 있는 이라면, 더 나아가 <반항하는 인간>에 드러나는 그 묘한 기운과 <페스트>에서 타르가 말하는 우리 모두는 페스트를 갖고 있다는, 그 긴 대사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본 독자라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읽힐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와 얼굴의 윤리적 맥락에서 해석한 카뮈의 작품은, 그래서 사르트르의 철학과 작품보다, 뭐랄까 더 인간적이고 연민이 담겨 있다. 최근 <페스트>를 읽으며 느껴진 연민을 나이 탓으로 돌렸는데, 꼭 나이 탓만은 아닌 듯하다.


사족

이쯤 되면, 사실상 교정을 보지 않은 거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번역자가 “아, 제 번역 원고는 단 한 군데도 고치시면 안 됩니다.”라는 단서를 달았던 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어수선함은, 오탈자는 사실상 직무유기에 가까운 거 아닐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반부부터는 조금 나아졌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