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서 읽은 책 14
SF는 Science Fiction이다. 직역하면 과학 소설이지 공상과학소설은 아니다. 과학 이론과 기술이 가미된, 혹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지 근거 없고 밑도 끝도 없는 공상에 기댄 소설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공상이라는 말은 소설에 붙은 혹 같은 표현이어서, 때로는 그 “공상”이라는 단어가 SF에 관심이 없던 독자를 그 세계로 끌어들이는데 일종의 허들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됐다.
좀 더 이 이야기를 밀고 나가면, 좀 거칠게 분류하면 SF 소설은 그야말로 공상의 세계와 세계관,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현재, 혹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현재 존재하는 나라와 도시를 배경으로, 현재 존재하는 기술의 진보된 형태를 미루어 짐작하여 적용시켜 쓴 소설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그 유명한 <듄>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가 대표적이고, 후자의 경우엔 <블레이드 러너>나 <삼체>, 김영하의 <작별 인사>, 좀 넓게는 <멋진 신세계>와 <1984>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테드 창의 이 소설집은 이 두 개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여덟 개의 소설 중 단연 압권인 소설은 첫 번째 작품인 <바빌론의 탑>과 네 번째 작품인 <네 인생의 이야기>다. 나중에 칼럼으로 쓰기 위해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통해 말하겠지만, 본질적으론 여덟 개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사람다움의 근간은 무엇인가 묻고 있다. <바빌론의 탑>에선 그 근간을 순수한 탐구 정신으로, <네 인생의 이야기>에선 자유 의지로, <영으로 나누면>에선 학문에 대한 열정과 뒤이은 공허, <일흔 두 글자>에선 조물주가 되고 싶은 근본적 열망과 그 한계를, <인류과학의 진화>에선 학문 혹은 학술의 세계에서 메타 휴먼(AI와 같은)과 대비되는 학자로서의 사람의 가치에 대해 묻고 있다.
또, <지옥은 신의 부재>에선 범람하는 기적과 천사의 재림, 천국과 지옥의 대비 속에서 신 없음의 철학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에선 외모에 대한 깊은 농담을 통해 PC주의와 산업사회 모두를 향한 날카로운 냉소와 그 와중에 우리가 나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론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소설집은 학원의 이과 학생들에게 읽힐만한 소설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문득 떠오른 소설집이다. 알다시피 1967년생인 테드 창은 1990년 데뷔 이후, 정확히 열일곱 개의 작품만 썼는데, 그마저도 중단편뿐으로, 앞서 언급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숨>에 모두 들어 있다. 특히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네 인생의 이야기>는 <컨택트(2016)>라는 제목 하에 영화화 됐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의 원제는 <Arrival>인데, 소설을 읽어보면 두 제목 다 신통치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감정을 느꼈지만 말이다. 아, 참고로, 이 영화는 현재는 스타 감독이 된 드니 빌뇌브가 연출을 맡았다.
이 영화를 통해 대강의 이야기와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제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아니, 뭐랄까, 지적인 자극과 인생에 대한 성찰을 동시에 주는 흔치 않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학원의 수학 선생님에게 미분과 적분에 대해 물었고, 역시 이걸 다 알고 있는, 나와 독서 수업을 하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에게 미적분을 나에게 설명해 보라고 했고 그걸로 세계와 인생을 해석하는 방식,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과 그 한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를 통해 내가 그 소녀에게 하려 했던 설명은 더 풍부해졌고 이로 인해 소설에 대한 내 이해가 더 깊어졌다. 좋은 학생은 언제나 좋은 스승만큼 많은 깨달음을 준다. 그 길고 깊은 깨달음에 대해선 후에, 독서 레터를 통해 이야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