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카뮈

의문에서 읽은 책 15

by 최영훈

내 글의 독자들은 알겠지만, 함께 책을 읽고 있는 아진이 덕분에 최근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응? 이 책이 이렇게 심오했나? 난 대체 그때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던 거지?’하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아직도 몇 권 있는 <책세상>의 카뮈 전집의 판본을 보니 1993년에 1995년 사이에 나온 판본들이다. 내가 막 이십 대에 접어들었을 때인데, 꽂혀 있는 목록을 보면 <결혼/여름>, <전락>, <적지와 왕국>, <안과 겉>, <행복한 죽음> 등이 있고, 카뮈의 젊은 날의 글을 모아놓은, 대성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무어의 집>도 꽂혀 있다.

대학 졸업반 때, <최초의 인간>을 읽은 후, 관심이 있던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던 기억이 있고, <반항인>(최근에 출간된 민음사 판본은 <반항하는 인간>으로 나왔다.)과 <시지프스의 신화>(이 또한 <시지프 신화>로 바꿔 나왔다.)는 너무 낡아서 새 판본을 구입했으니, 결론적으로 가장 유명한 두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도 당연히 읽어 봤다는 건데.... 응? 하는 반응을 보였다면, 다른 작품도 다시 읽어봐야 한다는 결론이 너무 당연하지 않나?


해석은 내게 있지 않다.

우선은 생각보다 얇아서 놀랐다. <현대지성> 판본으로 샀는데, 제법 훌륭한 일러스트가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내용(작가 연보를 포함해서)까지 합해도 2백 페이지가 갓 넘는다. 다 읽는데 두세 시간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그마저도 골똘히 생각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정말 술술 넘어갔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 짧은 소설의 매력은 뭘까?


난 뫼르소의 말투에서 지극히 담백함과 솔직함을 느꼈다. 심지어, 뭐랄까, 인간적인 면모까지 느꼈다. 후에 문제가 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그는 외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담담하고, 오히려 약간의 피곤함까지 호소한다. 그런 그가 양로원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그러나 살아보면 별 사람 다 본다. 장례식에서 펑펑 우는 자식이 있는 반면, 담담히 상을 치르는 자식도 있다. 그 자식의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문상객들은 그 겉, 일련의 사태만 보고 판단하게 되는데, 그 판단이란 것은 대체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마리? 장례식 다음날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하고 섹스를 했다고?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난 그 사실보다, 그 모든 것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뫼르소의 태도가 더 놀라웠다.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선은 자신을, 그리고 타자를.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누린다. 바다에 빠진다. 하늘을 본다. 담배를 피운다. 섹스를 한다. 그 모든 것들에 의미도, 명분도 부여하지 않는다. 스스로 확신이 없는 감정은 말하지 않는다. 물으면 최대한 정직하게 대답한다. 해석은 타자의 몫.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도, 그 역시 해석은 결국 타자의 몫.


낱개의 사건들, 부조리한 결말

레몽? 그건 사건이었다.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해프닝 같은 존재. 결국 모든, 낱개의 사건의 의미는 하나의 큰 사건을 통해 뒤늦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타자의 해석도, 그 해석의 오류도, 수정할 방법이 주체에겐 없다. 항변하지 않는다. 해변의 별장에 초대를 받았고 레몽의 여자친구의 오빠 무리와 마주쳤고 시비가 붙었고 레몽이 칼을 맞은 뒤, 뫼르소 혼자 바다를 산책하다 그곳에 다시 갔고, 그중 한 놈과 마주했으며, 그가 꺼낸 칼에 비친 햇살에 눈이 부셨고,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쐈다. 한 발, 잠시 후, 다시 네 발.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 붙잡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을 외면하며 보낸 하루가 저문 후, 그 사실이 악몽이 되어 찾아오는 밤이면 잠 못 들기에, 또다시 사람을 만나고 파티를 하고 술을 마시고....... 그렇게 상징과 의미의 향연으로 무의미를 덮고 산다. 때로는 종교로,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페스트>의 타로가 얘기했던 이념과 철학으로, <이방인>의 판사와 신부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어쩌면 뫼르소에게 살인보다 더 큰 죄가 있다면 삶의 무의미를 만천하에 노출한 거 아닐까?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이 그것을 못 견뎌, 그러니까 그 무의미를 덮어 두기 위해 별의별 허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그 표리 된 삶을 못 견뎌 구역질을 한 것과는 달리, 그저 뫼르소는 그 의미의 덧없음을 파훼(破毁)했던 거 아닐까. 그저 담담하고 무심하게 살면서.


사실, <망설임의 윤리학>에 남긴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놀라운 해석을 읽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좀 더 뒤에, 다시 읽었을지도 모른다. 여름에 아이들과 <페스트>를 읽기로 했으니 그때쯤 읽었겠지. 흠, 다 읽은 후,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해석에 공감하는 부분도, 안 그런 부분도 있다. 중요한 건, 이 소설, 젊었을 때 읽어봤자 별 소용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 의미 부여의 연쇄, 감정의 밀물과 썰물을 다 겪은 뒤, 날 좋아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너무 빨리 식은 열정에 스스로 놀라 떠나버린 연인, 혹은 사람과 내게 담담했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내게 뜨거웠던 몇몇 사람들과의 순간이 기억이라는 서재, 저 구석에 잔뜩 쌓인 후, 그때쯤 이 소설을 읽으면 뭔가 좀 다른 게 보이지 않을까. 긴 이야기는 여름에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