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02

by 최영훈

짬뽕을 먹을 줄 안다고 소녀가 되는 건 아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부모에게 말대꾸 좀 하기 시작했다고 소녀가 되는 건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해야 하는지 알 때, 그리고 그 혼자 있는 시간을 자신만의 시간으로 만들 줄 알 때 아이는 성숙해진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따로, 또 같이

은채는 혼자 놀 줄 알았다. 혼자 크는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물론 엄마가 퇴근한 저녁 시간이나 한가한 주말에는 그 품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아빠가 있는 공부방에 들어와 안아 달라, 놀아 달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집 안 어딘가 엄마나 아빠가 있다면 은채는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 뭔가를 한다.


전염병이 그야말로 창궐하던 2학년의 봄. 은채는 학교를 못 가는 나날들을 충실히 보냈다. 로알드 달의 소설을 읽고, TV로는 <흔한 남매>의 덕후가 됐다. 넘쳐나는 그림 도구로 다양한 그림도 그리고 카랑코에와 라벤더를 자기 용돈으로 사서 직접 물을 주며 키웠다. EBS의 온라인 수업이 시작된 후에는 아다치 미츠루의 야구만화 <H2>의 여자 주인공을 닮은 전해은 선생님의 강의에 몰입하며 30분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학습 꾸러미도 충실히 했다.


그러다 쉬는 시간엔 불쑥, 미국의 할머니가 보내준 재스민 공주의 코스튬 의상을 입고 인형들과 함께 안방에서 한바탕 공주 놀이를 하기도 하고 뜬금없이 한참 잊고 지냈던 최첨단 팽이인 베이블레이드를 갖고 놀기도 했다. 휴대폰으로 하영이 같은 친구와 문자를 하거나 통화를 하기도 했다. 5월에 있던 결혼기념일에는 몰래 준비한 이벤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벤트에서는 오마이걸의 <살짝 설랬어.>의 안무를 외워 춤을 보여줬고, 러브 액추얼리에 나오는 스케치 북 편지를 읽어줬다.


아빠가 늘 거기 있다는 믿음

역시 혼자 놀기 달인인 아빠가 서재에서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불쑥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고 느껴져서 딸을 찾으면 딸은 자기 방이나 안방에서 그렇게 다양하게 놀고 있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면 생긋 웃어준다. 어쩔 땐 “아빠, 간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출출해지면 찾기도 전에 서재에 나타나 과일을 깎아달라거나 과자를 먹어도 되냐고 물어본다. 살이 찔까 봐 엄마가 노심초사하다 보니 은채도 과자 먹는 거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쿠키를 몇 개 그릇에 담아 주거나 과일을 담아주면 <흔한 남매>나 <캐리 TV>를 보면서 먹고 빈 그릇은 싱크대에 갖다 놓는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자가 격리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학교를 못 간 수많은 언니 오빠들이 그랬듯이 은채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뎌냈다. 학교는 6월이 다 돼서야 갈 수 있었다.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은채를 보면서 은채가 학교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은 원래 곁에 있던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