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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이서 Jul 09. 2023

나에게로 또다시

바쁨은 삶의 디폴트 값이다.

현대인은 바쁘다. 나는 ’ 바쁘다 ‘란 표현도 하고 싶지 않으며, 바쁜 삶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해 보면 늘 바쁜 삶을 살아왔다. 하물며 초등학교 ( 나 때는 국민학교라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국민학교였을까? 6년인 국민학교는 전 국민 무상교육이어서였을까? 그러나 이 국민학교도 뭔가 돈을 내어야했고, 내지 못하던 학우가 선생님에게 불려 갔던 것을 기억이 나는데, 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붙였을까?) 정확한 숫자는 아니어도 45년 전쯤 된다. 50년 전쯤을 현대라고 칭할 수는 있을까? 의문이 든다만 어쨌든 초등학교 때도 늘 바빴던 것 같다. 학교수업도 빡빡했고, 숙제도 늘 있었고, 학교 외에 방송국 어린이 탤런트라는 ( 지금생각해 보면 웃기는) 직업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일상은 늘 빡빡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야 대학준비에 예나 지금이나 아주 많이 공부를 해야 했으니 바쁘지 않았던 삶은 한국인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연유에서인지 나는 ‘바쁘다’ 란 말 자체가 등장하는 것이 싫다. 내게 ‘바쁘다 ‘란 말은 내가 능력 있거나 내가 잘 나가서란 것을 대변한다던가, 일상의 자부심도 위로도 주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바쁘지 않은 삶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워라벨? 그건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지탱하고 살려면 불가능한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워라밸을 하고 있다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부모이던, 내 배우자던, 내 가족이던, 내 회사동료던, 회사의 복지던, 국가의 세금이던, 자신의 워라밸을 누릴 수 있는 바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나의 욕망을 줄임으로써 나는 워라밸을 해요 ’ 와는 다른 차원이다. 당신의 ‘누리는 워라밸’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회는 그렇게 지탱되고 돌아가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바쁜 것이 디폴트값이다. 거기에 인생을 50년 넘게 살아보니 평생 애쓰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더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치열하게 일하고 준비했다 치면, 이제는 누릴까? 결혼을 해서 아이라도 나으면 , 그때부터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넣어야 한다. 아이들이 좀 커서 이제는 좀 누릴까? 하면, 그때부터는 부모님들이 아파진다.  그리다 보면 은퇴가 바짝 다가와있다. 은퇴가 되면 사회에서 생산력이 없어져 다시 자신의 경제규모를 바짝 줄여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더라. 나의 부모님의 인생을 통해서 보았도, 나의 인생을 통해서 본 일반적인 인생이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삶이다.


삶과 일에 치이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시간 훌쩍 넘어가버린다. 그것이 어떨 때는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날 때도 있다. 그러는 사이사이 인간이기에 치열과 게으름 공존하고, 회의와 확신, 상실과 기쁨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 사이에 등장하던 ‘나 자신’을 붙잡고 싶어서일까? 정신없이 흐르는 삶 속에서 ’ 나의 존재‘가 불쓱 불쑥 등장할때가 있다. 삶의 부조화, 사회의 부조리에 내존가 갑자기 더 다가왔을 수 있다. 잠시나마 내 안에서 나의 존재를 느낄 때 어쩌면 그것이 나의 진짜 삶일지도 모른다. 삶에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은 가장 위약한 모습일 때도 있고 나도 모르는 강인한 모습일 때도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던 모습도 나였고, 내가 모르던 모습도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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