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공간
“높다란 층고의 남쪽으로 열린 공간, 햇볕이 가득히 그리고 깊숙이 들어온다. 비록 밖의 정경은 특별할 것 없는 서울의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다세대 주택의 측면일지언정, 그사이에 한 켜 정원, 레몬그라스에 한 그루 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며 삭막했던 도시의 숨을 드러낸다. 이곳은 건물 전체에서 가장 많은 남쪽의 해를 건물에 들이는 곳이며, 건물이 길로, 도시로 가장 많은 빛을 뿜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주현은 세상과 관계가 시작된다.” _ 환대의 공간 , 전이서
이곳은 건축물의 계획에서 첫 번째로 지키려 했던 공간이다. 높은 층고의 햇볕이 한껏 들어오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그대로 길에 보여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잠깐의 시각적 휴식을 주는 공간이다. 이곳은 1층의 필요 주차의 기능에서도, 비싼 임대료가 보장되는 경제성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우위로 지켜졌던 공간이다.
처음 기획 때부터 이곳은 두 개의 층을 열어 남쪽으로부터 햇빛 가득히 들어오게 하였고, 투명한 공간 너머로 잠시 멀어진 벽면은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도심에 있는 건물들의 벽으로부터 오는 답답한 감정을 후퇴시킨다. 벽이 아닌 공간이기에 살아있는 시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길가는 사람들과의 매개공간이자 환대의 공간이다.
도시는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도시의 길은 여러 건물의 얼굴이 모여 거리 풍경을 만들고 그중에서 괜찮은 거리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소가 된다. 길을 가다가 예쁜 건축물을 만나면 “이 건물은 뭐지?”라고 사람들은 기웃하게 된다. 1층에 예쁜 상점이라도 들어가 있다면 그 기분은 더 증폭된다. 예쁜 건물이 쭉 들어서 길을 상상해보라.
상상이 어렵다면 우리가 흔히‘ 오~ 이뻐’ 하며 감탄하는 유럽 구도시의 건물들을 떠올려 보라. 한번 우연히라도 사진으로라도 마주하면 좋은 기억으로 남고, 그곳으로 집을 이사하고 싶어지거나 자주 찾아가게 되는 거리가 된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면 유명한 거리가 되고 관광명소가 된다. 소위 뜨는 동네가 된다.
우리가 여행지를 고를 때 등장하는 도시들은 일단 건축물들과 상점들 그리고 거리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때 우리는 대단한 이성과 논리를 가지고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직감적으로 “휙~ ” 좋은 기분이 들면 고른다. 대중이 보편적으로 좋다고 선택되는 곳들은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도시가 현대까지 잘 이어져 온 구도심의 시가지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조금 세심하게 들어가 볼까? 관광객이 몰리는 유명지들이 관광객을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 있는 곳일까? 아니다. 그저 오랜 세월 ‘일상이 만들어낸 곳’이다. 그곳에 뿌리를 내린 지역주민을 위한 도심 주택들이고 그 지역사회가 필요로 했던 상가들이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리가 아니란 이야기다.
그곳에는 그들의 일상을 오랫동안 담아낸 건축물이 배경을 이루고, 그들의 삶이 작은 문화가 되어 나타나는 특이성을 가진 장소가 있다.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예전의 공간들이 관광객을 위한 상점이나 카페로 대체되었다 해도, 그 거리를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인식시키는 기본은 그곳의 오랜 세월 일상이 만들어낸 삶과 그것을 담아낸 건축물이다.
소위 뜨는 동네? 에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사람들은 무료한 일상이나, 피곤한 삶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다른 시간을 제공해줄 곳을 찾는다. 혼자이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던 특별한 시간이 되는 추억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이제 와 다른 공간을 찾는다. 여기에 돈을 벌고픈 사람들은 뜨는 동네에 돈이 모이니 돈을 들여 특별한 상점을 만들고 핫플레이스를 인위적이라도 만든다.
핫플레이스 ? “우리나라에서 그건 맛집과 공간 브랜딩이 잘된 상점이 만들지 않아요? ”
맞다.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임대 들어온 상점의 수준에 따라 동네의 모습이 많이 좌우된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잘나가는 임대상점들이 그곳을 떠나면 뜨던 동네가 쇠락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시적인 상황에 따라 뜨내기처럼 달라지거나 어느 특정 곳만이 괜찮은 거리가 되는 것은 너무 임대자들에게 의존적인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장소가 어느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로 퍼질 방법은 정말 없을까 ?
그 방법은 도시에 들어서는 보편적 건축물들이 지금보다 질적 수준이 좀 더 높아지면 가능해진다. 즉, 정주 공간을 이루는 도시건축물들이 좋아지면 아름다운 거리는 따라온다. 도시의 모든 길에 상점이 들어설 수는 없다. 도시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에서 주거시설이 주를 이룬다. 주거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신생도시를 계속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큰 도로변이 아닌 이면도로를 들어가 보면 흔히 우리가 만나는 근린생활시설의 상부층에는 주거시설이 자리 잡고 있거나, 다세대 다가구 주택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도시 중에 가장 앞선다는 서울을 보더라도 근생건물과 다세대, 다가구 건물들이 도시를 면하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아름답지 않다.
내 집을 지어보겠다고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니며 집 지을 곳을 찾아다니다 고개가 절로 떨구어지는 나 자신을 수도 없이 만났다. “아니 이토록 우리나라의 도심이 후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살고 싶은 동네 찾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유명하다는 동네도, 비싸다는 동네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싼 건축비가 그대로 드러나는, 관리 전혀 하지 않는 건물들이 줄지어 도시의 우울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도로에 면하고 있는 1층은 법규상 필요한 면적을 넘어 주차장으로 꽉 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건물로 들어가는 괜찮은 현관을 가진 건물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럼 고개를 들어 위를 볼까? 유일하게 햇볕을 들이고 건물의 눈이 되는 창문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성 스댕 난간과 발코니 확장법으로 태어난 난간에 바로 붙어있는 샷시로 둘러쳐져 이미 이곳은 세상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창들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튀어나온 발코니는 옆집과의 법적 최소 거리 50cm를 너머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 있으나 마나 한 건물 간의 짧아진 거리로 후미진, 때로는 위험한 취약지역이 된다. 추가로 걸어 달아맨 창틀 면이 가득한 그런 건축물들이 쭉 늘어서 만들어낸 파사드란 사실 흉측하지 않으면 감사할 정도이다.
그것은 개도국 시절 잔류의 원형으로 최소한의 기능을 충족하고 가장 이른 시일 내에 가장 저렴한 가격에 지은 건물들이기 대다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그 상황을 위로처럼 받아들였다. 이런 현실이어서 누구나가 돈을 조금이라도 모으면 아파트로 가겠다는 것도 수긍이 되었다. 같은 비용 지불이라면 열악한 환경을 선택할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시절의 건물은 이제 그만."
그럼 이런 건물들은 계속되어야 할까? 희망이라면 지금은 그렇게 지어진 건물들이 30년, 40년을 넘어서 리모델링을 하거나 새롭게 다시 지어져야 할 시점에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일상을 사는 도시가 바뀔 기회가 온 것이다.
이제부터 도심이 이제 와 다른 모습, 좀 더 성숙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사람들이 걷는 것만으로 기분 좋아지는 동네가 만들어질 수 있는 시기가 왔다고 본다. 그러고 달라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려면 내집짓기를 하는 각 개인들이 건축을 보는 소양을 늘리고 도시를 생각하는 노력이 따라주어야 한다.
내집을 짓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내안의 삶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조금더 확장되면 가족, 그것이 회사의 사옥일 경우에는 회사의 직원으로 확대된다고 볼수 있다. 그 건물의 주사용자들은 분명히 내부자들로 국한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들도 도시로 드러나는 접점은 반드시 생긴다. 그 건축물들이 결코 나만의 건축물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떻게 생긴 건축물이냐에 따라 도시민에게 기쁨을 줄 수도 있고,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도시와 소통하는 기분좋은 건축요소를 넣어보자, 잘 정제된 예쁜 현관만으로도 도시는 기쁠 수 있고, 잘 선택된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도시의 공원을 확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는 공간이어도 허락된다면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 그 공간의 깊이에서 잠시나마 쉼을 느끼게 된다.
잘 지어진 건축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는다. 내집짓기가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잠시 사는 사람들에도, 도시민에게도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