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기나 해 보자
보청기 센터에 피팅을 갈 때 선생님은 매번 물어보셨다. '보청기 안 빼고 잘 끼우나요?'
나는 항상 자랑스럽게 그러하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다행이라고 했다. 뭐가 다행인지, 그 의미가 뭔지 그때까진 잘 몰랐다. 그런데 돌이 다가올 무렵부터 무서운? 조짐이 보였다. 결국 준이는 보청기를 미친 듯이 빼고 있다.
보청기를 끼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손 사용이 자유로워지고, 귀의 불편함을 인식한 뒤로는 보청기를 끼우려 할 때면 격하게 도리 도리질을 하며 절대 귀를 내어 주지 않는다. 그때마다 과자를 던져주거나, 평소에 잘 못 보던 물건을 던져주거나, 이마저도 안되면 억지로 억지로 보청기를 끼운다.
보청기를 끼워주고 나면 절대 귀에 관심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혹시나 안아주다가 팔이나 옷깃이 준이의 보청기에 스치면 지지직 소리가 난다. 그러면 준이의 손이 바로 챡- 올라가서 보청기를 오차 없이 퐉- 빼낸다. 그리고는 입에 넣거나 혹은 바닥으로 집어던진다. 잡아 빼다 몰드(보청기 부속)가 찢어져서 다시 맞추기도 했다. 그래도 본체가 없어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시나리오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외출할 때마다 고민이다. 당연히 최대한 많은 시간 보청기를 끼워주는 것이 도움이 되지만 분실의 위험 때문에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밖에 나가면 정신없는 와중에 준이가 보청기를 내다 버리는 것을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걸음마 연습을 위해 신발을 신기기 시작했는데, 안고 다니다 보니 신발이 벗겨져서 없어질까, 보청기가 사라질까 위아래로 살펴보느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다. 그래서 그러면 안됨을 알면서도 종종 보청기를 가방 속에 고이 모시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준이가 난청이라는 것을 거의 잊고 산다. 아직까진 가정의 울타리에만 있으니 다른 아이들과의 차이를 의식할 만한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첫 순간은 준이가 아주 어렸을 때이다. 수유를 하려고 아이를 바짝 당겨 안으면 삐-소리가 나기 때문에 항상 간격을 두고 아이를 안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포옥 안아주지 못함이 말 그대로 불편했고(팔이 아픔), 마음도 불편했다. 지금도 아이를 안아주거나 얼굴을 쓰다듬어 줄 때면 요령껏 해줘야 한다. 물론 이젠 익숙해져서 스킨십에서 불편한 건 없다.
그리고는 지금과 같은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할 때다. 보청기를 챙겨야 하는 나의 스트레스도 있지만, 싫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끼워주는 것이 마음이 좋을 수가 없다. 건청인 아이였다면 전혀 겪지 않아도 될 일인데 라는 생각이 들면 미안함도 커진다. 커가면서 준이가 직면할 어려움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때마다 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서 있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쟁도 무사히 잘 치를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