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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Jun 21. 2023

10년 된 맥북과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모험

비움과 느림에 관하여


오늘 10년 된 맥북을 꺼내 곡을 썼다.

고물이나 다름없는 13년형 맥북 할아버님은 부앙- 하고 깨어난다. 찌그락 빠그락, 곧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상한 사운드를 쿨럭대며 내뱉었지만 용케 부팅을 끝낸다. 




첫 맥북을 산 것은 10년 전.

녀석과 함께 수십트랙의 데모를 만들며 열정과 방황 사이를 오간 5년 차, 데뷔싱글을 발매했다.

처음이 어렵지 그해에 두 개의 싱글을 더 냈고, 첫 맥북과 함께 그럴싸한 뮤비도 두 개 만들었다. 파죽지세로 정규 1집에 돌입하려 했지만 이미 맥북의 연식이 시원찮았다. 결국 큰맘 먹고 두 번째 맥을 영입, 무려 400만 원짜리 4k 아이맥이었다.



늠름한 자태의 아이맥 a.k.a사백이


무이자 24개월로 고이 모셔온 그분은

3년간 나의 광기와 혹사를 견디며,



정규 1집 12 트랙,

데모 약 60 트랙,

타이틀곡 뮤비 한편,

편당 20분이 넘는 유튜브 컨텐츠 32개를 완벽하게 소화한 후 2021년 여름 장렬히 전사했다. (방년 3세의 젊은 연식으로...)




3년 차부터 계속되는 원인불명의 셧다운 저주에 걸려 A/S센터를 세 차례나 다녀온 ‘사백이’ (내 아이맥의 애칭이었다)를 나는 폭풍 원망했다.



‘아니 얼마를 주고 산 건데 겨우 3년 쓰고 뻗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3년 만에 전사하는 게 당연한 작업량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작사 작곡 편곡과 보컬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하기 때문에 곡을 쓸 때 프로젝트 하나의 용량이 어마무시하다. 그런 걸 70 트랙 넘게 돌려댔고, 작곡 브이로그 한답시고 몇십 기가짜리 영상들을 때려 넣은 파이널 컷까지 무자비하게 돌렸으니…


녀석은 팬소리 한번 시원하게 내지 않고 얼마나 묵묵히 일했던가!


그걸 다 해내고 간 게 용하다.

그걸 다 해낸 나 자신도 용하다.

자신이 용하다는 생각을 3년이 지난 지금에야 해본다.

우리가 넉다운 될 만했다는 걸 이제사 느낀다.

그땐 정말 광기였여...




아무튼 그렇게 사백이는 가고,

내겐 번아웃이 왔다.



광기는 쏙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시간.



나는 머리카락을 잃은 삼손처럼 시들해졌다.

최신 M1맥북을 영입했지만, 2년간 세곡을 썼다.

이전과 비교하면 안 쓴 것과 다름없는 작업량이었다.

그것은 사백이의 부재 때문이었을까,

그저 흔한 번아웃이었을까.



그렇게 팬데믹 기간 동안

내 음악인생에도 재난이 선포됐다.

음악과의 거리 두기는 끝날 줄을 몰랐고

나는 좀비처럼 레슨만 해댔다.

불행했다.



우울과 불안이 나를 잠식했고 입시레슨이 너무 힘들었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니 조금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하고 버텨봤지만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지난 2월, 결국 나는 세상에 항복했다. 생존을 위해 밥통을 몽땅 걷어차기에 이른 아이러니. 그렇게 5년 다닌 예술고에서 퇴사했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영상을 찍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보냈다. 우울감은 나아졌지만, 음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1도 생기지 않았다. 제주도에도 다녀왔다.

7년 만의 여행이었다.



제주여행 영상을 편집하던 중 M1맥북이 셧다운 됐다. 로직보드가 나가서 교체를 해야 한단다. 다행히 애플케어로 무상수리에 들어갔다. 5일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주섬주섬

10년 된 맥북을 꺼내게 된 것이다.



고물이나 다름없는 13년형 맥북 할아버님은 부앙- 하고 깨어난다. 찌그락 빠그락, 곧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상한 사운드를 쿨럭대며 내뱉었지만 용케 부팅을 끝낸다. 


OS는 무려 카탈리나. 파이널컷을 열어봤다. 엄청난 팬소음과 함께 ‘상위버전에서 작업한 프로젝트들은 호환이 안된다’는 슬픈 메시지가 뜬다. OS 업데이트하면 돌아가실 것 같다. 아이고, 5일 동안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네.



그러다가 살포시 로직을 열어보게 된 것이다.

(로직은 작곡 프로그램이다)


맥북옹 드러누우실까 무서워서 이것저것 불러오진 못하겠고, 소리가 예쁘장한 피아노 하나 얌전히 골라, 보컬 한 트랙만으로 곡을 써본다.




내적평화….




그렇게 사흘째다. 사흘 연속 로직을 열고 있는 낯설고 익숙한 나를 발견한다. 애플 실리콘의 cpu를 탑재한 최신 맥북이 병원 간 틈을 타 은퇴한 맥북 할아버님이 “2년간 지속된 음악과의 거리두기”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는 중이다.



‘나의 노장’들이 총출동했다. 애잔한 마음에 하나하나 연식을 헤아려보니, 오디오 인터페이스, 스피커, 헤드폰, 마이크 모두 10년 차이거나 더 오래되었다.



모든 것이 오래됐고

주인인 나도 오래됐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낡았구나.

다들 제 몫을 해내고 있구나.



초여름이 그릉그릉한 6월의 어느 날,

오래된 장비들에 둘러싸여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맥북의 팬소음과 7시의 노란 석양이 작업실 구석구석을 채운다. 햇빛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는 것만 같은 멋진 시간이다.


만약 이대로, 나의 길었던 음악과의 거리 두기가 해제된다면 번쩍거리는 새 장비들을 찾아 헤매기 전에 나의 10년 차 친구들과 함께 '낡고 아름답고 느린 음악' 한곡쯤은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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