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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Jul 03. 2024

완주 고산 탐방기 1 : 여문 마음

로컬 기획자의 초여름 방학

지금 나는 완주에 있다. 완주는 작년 겨울 2박 3일 '고봉밥' 캠프로 처음 왔다. 기온이 유달리 높은 연말이라 걸어서 읍내를 나가고 농한기의 밭을 가로 질러 산책을 했다. 도꼬마리를 서로에게 던지고 박주가리를 터뜨리며 농촌 아이들처럼 무구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캠프에는 쉬러 온 사람들, 놀러 온 사람들, 지역 살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날 우리는 오래 산책하고 명상을 하고 큰 목소리로 농담을 하고 웃었다. 몸은 노곤했지만 마음만은 신이 나서 언제까지고 이렇게 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뜻하게 데운 모주가, 중앙에서 열기를 내며 타오르는 화롯대가, 날이 좋아 별이 총총한 하늘이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그 밤에 나는 둘러 앉은 사람들이 지닌 편안함의 상당량을 완주의 것이라고 여겼다.


겨울이 가고 봄에 한 번 더 완주를 찾았다. 이번엔 캠프가 아니라 여행이었다. 완주에는 화려한 관광지가 없고 어딘가를 애써 찾아 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덕분에 한껏 껄렁한 한량이 되었다. 2박 3일 동안 내가 완주에서 한 것이라곤 유유히 동네를 기웃거리며 걷고, 먹고, 앉아 있기. 완주는 선택지가 많지 않기에 있는 것들이 귀해지는 곳이다. 끝없는 한적함에 시끄러운 속이 고요해지는 곳. 생산적인 일, 경제적인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금세 초조함을 느끼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미워하기 일쑤인 나이지만 완주에서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놓였다.


만경강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멍 때리다 보면 3-4시간이 훌쩍 갔다. 때때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벤치에 앉아 쉬었다 가고, 개와 사람이 지나가고, 나이 든 부부가 걷다가 쪼그려 풀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강에서는 물살이가 뛰어 올라 참방, 소리를 내고 머리 위 나뭇가지를 흔들며 새가 날아올랐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아주 작은 존재였다. 풍경은 시간과 무관하게 내내 존재해왔고 영영 존재할 것이다. 나는 잠시 그 속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아주 작은 존재로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이 기꺼웠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고 허무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거기에 있을 수 있어 감사했다.


봄의 완주를 잠깐 맛보고 다시 돌아왔을 때 완주는 눈 닿는 모든 곳이 초록빛인 초여름이었다. 갓 수확한 양파와 마늘들이 도로 곳곳에 놓여 판매 중이고 막 심은 아기 벼가 바람에 흔들린다. 만경강은 만경숲이 되었다. 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하게 자라버린 풀들. 강변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날벌레들이다. 강둑에는 눈이 흩날리는 것처럼 온 시야가 날벌레로 가득해서 걸을 수가 없다. 입을 벌려서는 절대 안 되고! 게다가 완주의 햇빛은 서울보다 강렬하고 가차없어서 단단한 채비가 필요하다. 챙 넓은 모자와 양산, 팔토시는 필수. 모기기피제까지 준비한다면 더욱 좋다. 그렇게 준비해도 산책을 오래 하긴 어렵다. 팔을 점차 데우는 햇빛이 관능적이라고 느꼈던 서울의 태양과 달리, 완주의 태양은 무시무시했다. 관능이고 뭐고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뙤약볕.


잠시 만난 겨울, 봄의 완주. 그리고 새롭게 만난 여름 완주의 복판에서, 나는 여름 과일처럼 내 안에 여문 마음을 알아차린다. 완주에 남고 싶다. 완주에서 살아 보고 싶다.






겨울 완주  / 박주가리( 터뜨리면 부숭한 홀씨들이 훌훌 날아간다)


봄의 완주


여름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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