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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Jun 15. 2024

경주 청년 마을 방문기 3: 함께였던 덕분에

감포 가자미 마을 방문기

저녁 식사가 끝나면 다함께 자주 밤산책을 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함께 돌며 학교에 하나씩 있던 괴담을 나누고 멀리뛰기 시합을 하며 깔깔댔다. 항구를 따라 걸으며 낚시하는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보름달을 보고 함께 소원을 빌고 별을 보며 걷다가 스타링크를 목격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봤으니 운이 좋을 거라며 로또를 샀다.


처음 밤산책을 할 때에는 서늘한 바람 탓에 옷을 여며야 했다. 산책을 나가는 저녁마다 바람은 착실히 따뜻해지고 슬금슬금 고소한 향을 풍겼다. 하루하루 여름에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놓인 인적 없는 어두운 거리를 혼자서는 산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였기에 밤산책도 가능했다.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그 산책 덕에 시간의 흐름을 날씨로 체감할 수 있었다.


건들거리지만 건전한 한량들 같았던 9명의 산책자. 입시 스트레스, 사춘기의 강렬한 자기방어와 자기혐오때문에 가질 수 없었던 평화로운 청소년기를 뒤늦게 누리는 기분이 들었다. 평화로운 사춘기라는 게 가당키 하냐만은. 9명 모두 취업과 이직, 전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 마을에서의 시간은 생애 과제에 쫓기며 자신을 증명해내야 하는 불안을 미뤄둔 채 웃을 수 있는 틈이 되어 줬다. 천진한 마음을 앞세워 웃음을 터뜨리며 거리를 쏘다닐 수 있는 껄렁한 시간. 그렇기에 서로가 더욱 애틋해지는 각별한 시간이었다. 


가자미 마을에서 대여해 준 장비로 사운드 스케이프를 하러 가기도 했다. 몇몇 친구들은 사운드 스케이프에 푹 빠져 여러 번 바닷가로 나섰다. 돌아와 소리를 채집한다는 게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전하는 말간 얼굴에 나도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 앞에 모여 파도 소리를 들으러 해변으로 걸었다. 바닷가가 보이자 모두들 일제히 멈춰 서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헤드폰을 꼈다. 헤드폰을 착용하는 순간, 고요한 배경음이었던 파도 소리가 귀를 왕왕 울렸다.


철썩. 처얼썩. 찰박 찰박. 차르르륵. 쿠르릉.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고유한 소리들에 귀기울이자 우리는 각자의 풍경이 되었고 오직 소리만이 주인공이었다. 온몸이 사라지고 귀만 남는 순간 숨통이 트였다. 나는 어떤 적극적인 행위 없이도 능동적일 수 있었다. 나는 듣는 주체가 되어 세상을 향해 관심과 애정을 다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에 존재하면서.


초여름 바다로 뛰어드는 것도 난생 처음 해본 일이었다. 신입생 시절, 엠티에서 선배들의 장난으로 입수한 적은 있었지만 바람이 사납게 부는 날 자의적으로 바닷물에 뛰어들고 "버텨!" 외치며 바닷물을 맞는 건... 기존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지만 좋은 장소를 찾았다며 이끌고, 이미 젖은 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이들과 함께 걷자 조금 달라지고 싶었다.  으엉... 너무 차가워. 너무 추워. 후다닥 해변으로 나와 달궈진 돌들 위에 누웠다. 바람이 휭휭 부는데도 등은 따수웠다. 바다에 뛰어들어 젖은 내 모습이 스스로도 어색했지만 헤엄치는 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덕분에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구나. 이런 나를 만나게 되는구나.


각자 품은 고민에도 이렇게 걷고 떠들고 웃을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환한 얼굴을 둘렀지만 여전히 숨어 있을 어둑한 불안을 짐작하자 이 시간이 더욱 귀했다. 아주 아름다운 순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 그리워하며 내내 사랑하게 될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


나는 나를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형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실은 좀처럼 먼저 다가가지 않는 고양이형 인간이라는 것도 알았다.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크루들과 함께 하는 일은 혼자 지내는 일보다 피로도가 높아 후반에는 체력 저하로 자체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나의 시간을 갖곤 했다. 하지만 크루들은 사회적 배터리가 쉽게 방전되는 체력 때문에 선을 그어 버리고 마는 내게 끊임없이 다가와주었다. 부탁이나 제안에 머뭇거림없이 그럼요 당연하죠 물론이죠! 대답하며 환영해주었다. 덕분에 내가 아닌 세계를 잠시 맛볼 수 있었다. 세계는 어쩌면 이렇게 다정한 이들과 함께 하며 야금야금 넓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겁쟁이고 때로는 깍쟁이어도 품을 내어준 이들 덕분에, 방학 같았던 틈새 시간 덕분에, 나의 반경은 부드럽게 허물어지고 내가 아닌 나로 물든다. 호사스러운 행운을 누렸다. 함께였던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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